김하윤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공자가 주유열국하는 도중 진나라와 채나라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곤경에 처한 공자는 이레 동안 쌀밥은커녕 묽은 국조차 먹지 못하는 형편에 놓였고, 허기를 잊는 유일한 방법은 잠을 청하는 것뿐이었다. 이때 제자 안회가 인근의 농부에게 쌀을 구하여 밥을 하게 되었는데, 잠을 자던 공자는 안회가 밥을 한 움큼 집어먹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공자는 이 모습을 짐짓 못 본 척하면서 돌아가신 부친에게 깨끗한 음식으로 제사라도 지내고 싶다며 안회의 마음을 떠본다. 그러자 안회는 지금 이 밥은 재가 들어가서 안 된다고 말하며, 음식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기에 본인이 집어먹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제야 안회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공자는 믿을 수 있다고 여겼던 눈[目]뿐만 아니라 이젠 마음[心]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며 오해했던 마음을 부끄러워한다. 이에 깨달음을 얻어 제자들에게 사람을 아는 것이 진실로 어렵다는 것을 잘 기억하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인간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씨춘추』에 ‘사람을 아는 것이 진실로 어렵다[知人固不易]’는 주제를 담아 전하는 이야기이다.

공자는 해박한 식견으로 사람을 잘 꿰뚫어 볼 줄 아는 성인이고, 안회는 덕행이 뛰어난 공자의 애제자 중의 한명이다. 세계 3대 성인으로 손꼽히며 정확한 사리 판단을 한다는 공자조차도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행동을 의심하며 오해하는 상황이니,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섣부른 판단과 오해가 얼마나 많을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공자의 예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그러한데,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싹트는 오해와 불신의 불협화음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을 알아가며 관계를 맺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어려움을 넘어서 가끔은 두렵기까지 하다. 나이가 들면 원숙한 혜안으로 상대방을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젊은 시절의 패기도 점점 치기어린 오만으로만 느껴지고 만다. 초면인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같은 구성원으로서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도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한다는 것이 참으로 지난(至難)하다. ‘관계 스트레스’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며, 인생에서 ‘사람공부’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우리가 성인으로 칭송하는 공자도 제자의 행동을 의심하는 우(愚)를 범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을 알아가는 것 또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식은 책에서 얻을 수 있지만, 정답이 없는 사람관계를 책만으로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하나의 모범답안을 찾아가는 삶의 연속이 사람공부의 유일한 해법인 셈이다. 관계는 기본적으로 ‘나’와 ‘너’가 성립돼야 맺어진다. ‘사람인(人)’의 자형이 작대기 두 개가 서로를 떠받들어주는 것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지탱해주며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人間)’이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 1위는 ‘내가 옳다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 말은 타인의 말이 틀렸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타인에 대한 불신은 곧 관계의 부정을 불러오고 만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관계의 스트레스를 조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원숙한 관계를 위해서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버리고, 나만 옳다는 아집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정답이 없는 사람 관계에서 정해진 답만을 찾으려는 어리석음 또한 경계해야 한다. 더구나 자신의 주관적 편견을 유일한 답인 양 떼쓰는 무리들은 관계맺기에서도 편식(?)만을 일삼는 법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려 하는 끼리끼리의 무리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타인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관계는 내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무조건 타인만 바꾸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부터 변화하는 자세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움직여야 타인의 행동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람공부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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