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기대주, 아들 주황을 낳다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온라인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8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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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기대주, 아들 주황을 낳다

1991년 여름 아버지 어머니께 인도네시아 관광을 시켜드리기 위해 서울~자카르타 왕복 비행기 표를 사서 보내드리고 자카르타 우리집으로 모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20여 일 동안 자카르타 명소는 물론이고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보로부두르 사원(Borobudur Temple)과 프람바난 사원(Prambanan Temple)이 있는 족자카르타(Yogjakarta)와 세계적인 휴양지 발리를 여행하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연일 가시는 데마다 산해진미 음식과 풍성한 열대과일로 대접을 받으셨다. “너희들 우리 이렇게 좋은 구경 시켜주고 매일 맛있는 것 대접하고 부모 호강시켜 주는 것 고맙다. 그래도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 더 낳는 게 더 효도하는 것인 줄 알아라.” 귀국하시면서 하신 어머니 말씀에 따라 아내와 나는 아이를 하나 더 낳기로 했다.

그 다음해 1992년 여름에는 장인 장모님을 모셨다. 아내의 해산 3주 전에 오셔서 자카르타와 근교, 족자카르타, 그리고 발리까지 구경하셨다. 관광을 마치고 아내는 장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자카르타 분다 병원의 특급호텔방 같은 특실에 입원을 했다. 아이를 낳을 때 나도 가운을 입고 의사, 간호사와 함께 아이의 순산을 도왔다. 아내는 우리 가문의 기대주, 아들 주황을 낳았다.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드렸다. 그리고 주황의 고추 달린 모습을 사진 찍어 우편으로 아버지 어머니께 보내드렸다. 임 씨 가문의 기대주 아들 주황도 낳고 친정어머니의 산바라지를 받으며 아내는 편안하게 몸조리를 했다. 퇴원하기 전 나는 병원에서 소개받은 베이비시터(Baby-sitter) 알선업체를 방문해 아내와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이 좀 들어 경험 있는 엔당을 면접하고 데려왔다. 그리고 엔당과 아기침대도 사고 아기 돌보는 데 필요한 물품들도 구입했다.

아내와 주황을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온 날 밤이 깊어 잠을 자려는데 엔당이 우리 방문을 노크하며 아기를 달라고 했다. 아니? 어떻게 아기를 남(?)에게 맡긴단 말인가? 낮에 돌보는 것은 엔당의 일이지만 밤에 잘 때는 우리가 데리고 자야 되는 것 아닌가? 조금 있다가 다시 오라고 하고 아내와 나는 심각한 의견 교환을 했다. 엔당을 데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엔당은 아내 대신 아기를 돌보는 보모가 아닌가? 인도네시아에서 마님이 된 아내가 보모에게 아기를 돌보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밤에 아기가 일어나 울 때 돌보는 일이 보모의 몫이고 편히 주무시는 게 마님이 누리는 특권 아닌가? 결국 아내와 나는 주황을 엔당에게 맡기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집으로 와서는 친정어머니께서 아내의 개인 의사가 되셔서 처방을 내리시고 엔당과 가정부 두 명은 궁중의 시녀(?)가 돼 아내를 돌본다. 아내는 그렇게 왕비(?)같이 한 달 동안 산후조리를 했다. 한 달 후 아내가 외출을 하는데 아기를 낳은 사람이 혼자 다니니 처음에는 어색했다. 한국에서 아기 엄마는 당연히 아기를 달고 살아야 되는데 혼자 다니다니! 이렇게 우리 가문을 빛내게 될 아들 주황은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고 근 1년 반을 인도네시아에서 자랐다.

1993년 여름 인도네시아 생활 3년 차에 치른 주황의 돌잔치에는 큰 동서네가 와서 참석했다. 주황의 돌잔치는 교회 목사님과 우리 부부가 봉사하는 성가대의 대원들, 아내가 봉사하는 유치부의 선생님들을 초대해 한국식당을 빌려서 차렸다. 몇 가지 떡과 과일은 별도로 준비를 하였다. 동서네와 우리 가족은 목사님과 교회 어른들과 한 식탁에 점잖게 앉아 있어야 했다. 각 가정에서 잘하는 음식 한두 가지씩 해 가지고 와서 주황의 백일상을 차려준 우리 뜨붓 구역 식구들이 돌잔치에도 마치 우리의 형제자매처럼 한복으로 차려입고 잔칫집에 오시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자리를 안내했다. 해외에서 외롭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아내의 언니와 형부도 한국에서 오고 이렇게 구역 식구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재미있게 지내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동서네도 첫 해에 오신 아버지 어머니와 둘째 해에 오신 장인 장모님과 같은 코스로 여행을 했다. 자카르타와 근교는 아내와 지영이가 안내를 했고, 족자카르타와 발리는 내가 안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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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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