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지금 우리 한반도는 세계 사람들의 매우 큰 관심이 모아지는 놀라운 핵심에 들어와 있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도 매우 귀중한 꼭짓점 중 하나에 와 있으며, 인류사회를 위하여서도 아주 탁월한 전환점에 도달해 있다. 깊은 우려와 함께 아주 간절한 바람을 보내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무서운 핵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거쳐 봄바람 불고 봄비 내리는 평화의 기운이 감도는 듯한 양극이 교차되는 시점에 있다. 매우 긴장되는 순간이다. 날마다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 속에서 어떤 산뜻한 소식이 묻어오려나 기다려지면서 동시에 꽃망울 터지는 순간 혹시 날카로운 꽃샘바람 같은 칼날이 나타나지 않으려나 하는 걱정이 이 한 점에 모여든 느낌이다. 판문점이다. 골고다 언덕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비지땀을 흘리면서 어려운 발걸음을 내디디는 예수를 보는 것 같이 우리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는 지점에서 어떤 불꽃이 튈 것인가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인류의 역사가, 지금 세계의 흐름이 우리에게 지워준 짐이다. 그 짐 속에 귀한 보배를 담고 있을까? 아니면 고무풍선과 같이 허망한 것을 담고 있을까? 마치 비눗방울같이 참으로 조심스럽고 다루기 힘든 맑고 밝은 꿈같은 실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절대긍정의 맘속에서 거짓과 그림자는 사라진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 짐은 누구인가 대신 짊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언젠가는 당당하게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가다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지라도 가벼운 맘으로 짊어져야 할 짐이요, 쉽게 언덕 위에 오를 수 있어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나가야 할 짐이다. 지다가 넘어지면 분명히 그것을 받아서 짊어지고 갈 이가 생긴다. 소리치고 박수치며 응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떼로 힘을 보내는 짐 짊어짐이다. 그 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힘이 없어 국권을 잃었던 역사, 독립하고 해방공간에서 남의 도움을 받았고,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역시 다른 세력의 개입으로 갈라져 독립과 해방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 동족이라면서 비할 수 없이 무서운 싸움을 치러야 했던 나라, 가장 가깝지만 서로 가장 멀리 두고 심각한 적대관계로 치달리던 역사, 끝없는 무력과 이데올로기 대결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가지지 못하던 땅, 바로 이 땅에 다투지 않고 사람 냄새나는 화평한 세상을 스스로 제 힘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땅, 부끄러움과 수모와 거짓과 종살이를 벗고 영광스럽고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는 땅. 물질과 무력과 대결의 시대는 가고 정신과 화평과 정답게 함께 사는 아름다운 생명공동체를 인류 사회에 선사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땅. 바로 그것을 이루어야 할 짐이 우리가 지고 가는 무거운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속알이다. 이제 그 속알을 잘 품었다가 깨어나게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며칠 뒤에 있을 판문점에서 이루어지는 남북정상회담과 그 조금 뒤 북미정상회담이다.

그것을 앞두고 봄비가 내린다. 촉촉한 비가 아니라 좀 센 비가 내린다. 이것은 좋은 아름다운 징조가 아닐까? 겨우내 얼고 가뭄으로 푸석해진 땅을 꼭꼭 채워 다져주는 봄비. 그 비 온 뒤 다져진 땅에 세워질 굳은 약속과 실천의지. 그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첫 발을 내디디는 시작일 뿐이다. 속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들도 생각 밖으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속아도 좋다. 혹 속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자의 말 속에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말이 있을 때 그것을 믿어주면 그 말은 속임을 넘어 진실로 실현되는 것이 역사의 진전이다. 그것을 믿고 좀 길게 보고 가면 곧 속임이 진실로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속임수는 한 발 앞으로 나가는 징검돌이 된다. 그러니까 속일 것이라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믿고 나가는 자는 언제나 참의 자리에 함께 서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이른바 좌와 우를 떠나서, 자기가 들어 있는 파당의 논리가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진정한 양심과 이성의 눈으로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의심이 생기면 솔직히 의심해야 하고, 믿어줄 일이라 판단하면 적극 밀어주면 된다. 거짓 없는 반대와 찬성, 이 두 맘의 근원은 잘 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맘일 것이다. ‘팀추월’경기에서 맨 뒤에 달리는 선수가 결승점에 들어와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 역사과정은 맨 뒤에서 의심하고 끌어내리고 억지를 써가면서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도 함께 가야 이루어질 경주다. 그러니 의심하고 반대하는 이들은 속히 맘을 돌려 전체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힘을 모을 때다.

북쪽에서 핵 동결과 핵 폐기를 위한 부분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다 조건 없이 즉 남·북·미·중이 한 자리에 앉아서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각 나라의 체제가 어떠하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지극히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실제로 빈번하게 오고가면서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길이 트기를 바란다. 남북이 모두 군비를 평화롭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세계사회에 우리는 이렇게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했다는 것을 알리고, 무력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모범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짐은 곧 세계사회가 고민하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여기가 평화로우면 세계가 평화롭고, 여기가 전쟁의 위기에 빠지면 세계가 고통스럽다는 의식의 짐, 그 짐을 가볍게 짊어지고 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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