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주형직 을지대 교목

최근 TV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종영했다. 13년 동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프로그램의 종영은 그 세월만큼 달라진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은 “도전을 거듭해 성장한다는 서사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인이었지만 이제 정상의 위치에 오른 그들의 도전이 무의미해졌다”고 말한다. 대중은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 성공을 믿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이지만 시대가치가 성공에서 행복으로 이행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성공을 행복이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산업화, 민주화라는 거대담론의 혼란 속에 살았지만 미래를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꿈을 뒷받침할만한 시스템은 열악했지만 누구나 정상에 오르기를 꿈꿨고 노력의 대가를 의심하지 않았다. 문화적 욕구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경제적 욕구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성공이라는 생의 목표가 통속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기능적으로는 삶의 의미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확실히 성공을 행복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행복의 당위가 아닌 선택으로 여긴다. 무엇 때문에 성공해야 하는지를 되물으며 더 이상 가능성 없는 도전보다 즐기기에 몰두한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전통적 가치와 통념은 의심의 대상이 됐다. 삶의 우선순위는 헝클어졌으며 사회질서를 유지했던 기존의 틀은 족쇄로 인식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사회 변화가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사회 행복에 대한 기준은 달라져야 한다. 잘산다는 건 출세나 사회적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삶 혹은 좋은 삶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조금 더 다양한 기준의 행복이 논의돼야 한다. 목표와 성장 중심의 틀에서 벗어나는 건 시대 요청이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행복을 삶의 의미로 규정한 경계마저 알 수 없게 된 오늘의 현실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꿈을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청년들의 눈물과 좌절이 가슴 아프다. 성장은 멈추고 경쟁이 치열해진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현실이 분노와 상실을 양성하고 있다.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자본 논리에 따라 욕망은 커졌지만 그것을 충족할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경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라진 시대에도 욕망을 충족할 도구는 오직 경쟁뿐이란 사실이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심성은 더욱 거칠어졌고 비판적이지만 성찰은 거부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초조함에 숨통을 조여오지만 멈추는 순간 추월당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 과열된 경쟁 속에 승부가 나기 힘든 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반칙과 편법이 동원된다. 배경과 출신이 중요해지고 학벌과 스펙이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갑질 논란에 분노하고 금수저 타령에 열을 내는 건 희박한 기회마저 반칙과 불평등으로 박탈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의식과 분노로 바뀌는 건 없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함께 분노하는 건 잠시잠깐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처방은 아니다. 정말로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포기하는 게 아니라 성공이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해 벗어나고자 한다면 내면에 굳어진 성공과 실패의 관념적 틀을 재구성해야 한다.

성공은 경쟁을 최우선의 가치로 간주하면서 이기는 걸 의미있는 삶의 목표로 몰아간다. 그리고 다수의 실패를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을 묵살하고 삶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패가 곧 패배자는 아니다. 우리는 각기 고유하고도 소중한 존재로 세상에 불려졌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나의 나됨이 나를 긍정하게 하고 자기존엄을 지키게 한다.

또 네가 기뻐야 나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관계를 통해서만 삶의 의미가 뚜렷해짐을 알게 될 것이다. 경쟁이 아니라 조화이다. 더 이상 자조와 탄식으로 살면서 인생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시대를 핑계하면서 행복을 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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