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인생 휴가 중 여행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인터넷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8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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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인생 휴가 중 여행

주황이 태어난 지 6개월쯤 됐을까? 우리는 싱가포르로 23일 여행을 다녀왔다. 첫날 우리는 센토사에 갔다. 모노레일 기차를 타고 센토사 섬을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 내려 구경을 했다. 미니 동물원에 내리니 딸 지영이가 사람들과 친숙한 닭이며 가축들과 어울려 논다. 지영이가 닭을 쫓고 가축들을 건드리며 놀자 주황이도 엄마 품에서 워워소리를 내며 손짓을 한다. 언더워터 월드(Underwater World)에 내려 수족관에 들어갔다. 무빙워크를 타니 바닷속에 들어온 듯했다. 머리 위에서, 또 옆에서 노는 각양각색의 바다 고기들을 바라봤다. 빨강·노랑·파랑·초록 등 선명한 빛깔이 나는 예쁘고 깜찍한 각종 모양의 고기들을 모아 놓은 수족관들을 돌아봤다. 지영이는 주황이를 안고 수족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 딸과 아들의 사진이 너무나 깜찍하고 예쁘게 나왔다. 이렇게 하루를 잘 놀고 저녁엔 싱가포르에 근무하는 선배 집에서 한국 음식으로 잘 먹고 호텔로 들어왔다.

53층 높은 호텔 방에서 싱가포르의 야경을 감상하고 자려는데 주황이가 잠투정을 했다. 계속 보채며 울었다. 잠시 잠이 드는가 싶더니 또 울어댔다. 새벽까지 아내는 잠도 못 자고 주황이와 실랑이를 했다. 나는 지영이와 한쪽 침대에서 잠이 들었지만 간간이 우는 주황이와 힘들어하는 아내를 봤다. 주황이는 잠자리가 바뀌어 그런지 밤새 칭얼대다 잠들다 하다가 아침 늦게야 한숨 자는 듯했다.

둘째날 우리는 오전 늦게 일어나 주롱 새공원으로 갔다. 역시 모노레일을 타고 먼저 한 바퀴 돌았다. 떼 지어 놀고 있는 홍학들을 감상했다. 하늘 높이 망을 쳐 놓은 넓은 새장 안에 들어가 온갖 새들을 관찰했다. 새쇼를 관람하러 갔다. 쇼맨의 부름에 우리 관람객들의 머리 위로 휙휙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며 환성을 질렀다. 무대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새의 묘기도 보고 박수를 쳣다. 어느새 주황이는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잠든 주황이를 안고 새공원에서 나와 2층 버스를 탔다. 주황이가 잠이 들어 아내는 아래층에서 주황이를 재우고 지영이와 나는 2층으로 올라와 맨 앞자리에 앉아 싱가포르 시내를 관광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와서 잠시 쉬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싱가포르 백화점들을 둘러보다가 특별히 살 것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호텔로 들어왔다. 싱가포르 TV를 보며 놀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주황이 또 잠투정을 한다. 전에 잠투정하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엔당(인도네시아에서 채용한 베이비시터)으로부터 주황이가 잠투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는데. 아내가 주황이와 실랑이를 하며 힘들어하니 내가 안고 얼러봤다. 그렇지만 주황이는 림을 치며 싫다고 했다. 지영이가 나섰다. 지영이가 주황이를 재우려고 하자 잠시 누나를 쳐다보더니 또 울어댔다. 결국 주황이는 아내의 몫이 되지만 엄마 품에서도 여전히 보채며 잠투정을 했다. 결국 이튿날 밤도 주황이의 잠투정으로 주황이도 아내도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새벽에 주황이도 지치고 아내도 지쳐서 둘 다 피곤에 떨어져 잠시 잠을 잤다. 낮에는 잘 놀고 어디 아픈 데도 없는데 너무 잘 놀아서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싱가포르 여행을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카르타 집에 들어오자 엔당이 주황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주황이도 엔당에게 얼른 안겼다. 그날 저녁 주황이는 언제 잠투정을 했냐 싶게 엔당 품에서 잘도 잠이 들었다. 주황이는 낮에는 누나와 아내와 잘 놀지만 저녁에 잘 때는 엔당이 옆에 있어야 자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저녁에 엔당이 없으니 -엔당 엄마(?)가 없으니-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투정은 엔당을 찾는 것이었다. 어린 주황이는 엔당을 엄마로 생각하고 아내는 낮에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주황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때 우리는 자카르타에서 자동차로 1시간쯤 거리에 있는 뿐짝 별장을 23일 동안 빌려 놀러갔다. 싱가포르에서와 같이 잠을 못 자는 사태가 없어야 하겠기에 주황의 보모 엔당과 가정부 시우스를 데리고 같이 갔다. 더운 자카르타를 빠져나와 시원한 휴양지 뿐짝 별장에 오니 너무 좋았다. 주황이의 짐과 준비해온 과일, 먹을 것들은 엔당과 시우스가 들여놓았다. 아내와 나는 지영이와 함께 주황이를 데리고 놀았다. 그네를 태워주기도 하고 지영이와 시소를 타게 하기도 했다. 별장에는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녀석도 우리를 따라다니며 놀았다. 오랜만에 야외에서 놀다 피곤해진 주황이가 연신 하품을 해대니 엔당이 와서 데리고 들어가 재웠다. 별장에는 지영이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별장지기의 딸이 있었다. 우리 식구들끼리 놀 때는 별장지기의 딸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주황이가 들어가자 지영이와 말을 주고받더니 둘이서 어울렸다.

아내와 나는 별장 앞 넓은 들판을 산책하기로 했다. 회사 식구들과 설날과 추석 때 놀러온 별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별장이었다. 회사에서 빌린 별장은 별장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위치한 큰 별장이었는데 이번에 빌린 별장은 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을 따라 중간 중간 지어져 있는 별장 중의 하나였다. 도로를 뒤로 하고 앞이 탁 트인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녹음이 짙은 계곡의 들판에서 챙이 넓은 모자(베트남 전쟁 뉴스 때 봤던 베트남 여자들이 쓴 모자)를 쓴 여자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는 전원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우리는 계곡의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 다니며 자연을 만끽했다. 너무 좋다! 이국의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들어온 우리 두 사람은 이방인이었다. 이곳은 4세기경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중국 평화경, 무릉도원의 풍경이었고, 우리 두 사람은 그 이상향의 마을에 들어간 속세 사람이었다.

저녁을 먹고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잠든 후 테라스에 앉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가 낮에 놀다온 전원의 풍경을 그리며 앞의 계곡과 들판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비가 내렸다.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껏 소리를 높여 노래하도록 비가 강하게 쏟아졌다. 때로는 약하게 내려 우리 마음속에 간직해둔 서로를 향한 사랑의 노래를 잔잔하게 부르게 했다. 깊은 밤 별장 테라스에 앉아 빗소리를 반주삼아 감사와 사랑의 노래를 연신 부르는 우리 두 사람. 어느새 우리는 무릉도원 어느 언덕 위의 한 집에 들어와 앉아있었다.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낮에 다녀온 이상향의 세계에 밤에 다시 들어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었다. 문득 이상향의 세계에서도 현세의 삶 속에서도 나의 동반자, 나의 친구가 되는 내 연인 내 아내를 바라봤다.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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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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