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상 우리 민족에게 활은 중요한 생존의 도구이자 무기였다. 때문에 고려인은 벽화에 활로 사슴과 호랑이를 ?는 수렵도를 남겼고, 역대 무과시험에는 활쏘기가 중요 과목으로 포함되었다. 생각해보면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말은 몇 사람의 명궁 때문이 아니라 이 같은 문화, 제도와 연관되어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또 명궁이라 한들 주몽이나 이성계 정도 외에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이들의 활솜씨도 몇 가지 사건을 모티브로 구현한 과장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최근 ‘정조 활쏘기와 고풍’이라는 논고를 통해 정조 활쏘기의 전모를 조사·분석한 바 있다. 때문에 필자에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정조대왕을 꼽을 것이다.

왕의 활쏘기는 대사례나 연사례라는 왕실행사로 진행되는데, 정조는 절차가 간소한 연사례를 주로 시행하였으며 그 기록이 1787년부터 1798년까지 262건이 남아 있다. 정조가 이렇게 활쏘기를 자주한 이유에는 양면성이 있다. 우선 표면적으로는 문신에게는 상무정신을 진작시키고 무신에게는 실전능력을 갖추게 함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정략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집권세력 노론은 정조의 보복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자객을 보내는 일까지 감행하였다. 정조는 권력 장악을 위해 수원화성 축성, 장용영 설치, 무예도보통지와 병학통 등의 무예서 편찬 등의 과감한 군사정책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직접 군복을 입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지휘하거나 무예를 시범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눈에 띄는 대범한 행보는 정적들의 위기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반면, 왕의 활쏘기 전통인 연사례는 명분의 정당성 때문에 정적들이 대놓고 공격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즉 정조의 활쏘기는 세력 포섭과 결집을 위한 매우 영리한 정략적 행위인 셈이다.

정조는 활쏘기를 가법(家法)으로 여겨 젊은 시절부터 활쏘기를 즐겼다. 활 쏜 내역을 기록한 사기(射記)의 일종인 ‘고풍(古風)’이라는 문서에는 일자와 장소, 과녁과 화살의 종류, 발사한 화살과 과녁에 맞춘 화살의 수량, 적중처, 점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함께 활을 쏜 신하들의 면면과 이들에게 내린 하사품, 때로는 활쏘기가 끝나고 정조와 신하가 주고받은 시문과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남아 있다. 정조는 262회의 활쏘기를 통해 총 5760여 발의 화살을 쏘았는데, 실력이 정점에 달한 때는 1792년이었다. 이 해에 정조는 14회의 몰기(沒技: 1회에 50발을 쏘아서 49발을 과녁에 적중시키는 것)를 기록했다. 몰기는 보통 사람은 평생 한두 번 얻기도 어려운 성적인데 정조는 총 17회를 기록하였고, 특히 이 해에 14회를 기록했다. 때문에 자신도 놀라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동안 정조에 대해서는 역대 최고의 학식을 갖춘 ‘문인군주(文人君主)’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고, 또 정조 개인의 무예실력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지 않았다. 때문에 명궁의 한 사람으로 정조가 꼽히지 않는 것은 안타깝지만 당연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언젠가 우리나라 최고의 명궁으로 많은 사람이 정조를 꼽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참고로, 정조의 무사적 기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예정되어 있어 소개한다. 수원시 수원화성박물관 특별전 <무풍의 본향, 수원>(5월24~7월22일).

장을연<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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