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우 공주대 교수

 

누구나 지금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바라게 마련이지만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세상에 맞추거나 아니면 세상을 자신에 맞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인간사회에 펼쳐지는 다양한 삶과 문화의 파노라마는 이러한 노력의 소산이다. 도전과 응전의 논리로 문명의 흥망성쇠를 논하고 있는 토인비(Arnold Toynbee)의 역사관에 따르면 인간사회에서 적응의 과정이 원만하게 이뤄지려면 중용의 상태가 확보돼야 한다. 어떤 문명이든 중용 또는 평형을 잃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적 질서가 파탄에 이르게 되고 그러한 문명은 성장을 멈추거나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의 과정엔 수많은 도전과 응전의 계기가 발생해 그 문명의 진보와 쇠퇴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를 전후해 거세게 밀려왔던 서세동점의 도전 앞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결과 나라가 망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을 겪었다. 남북분단과 6.25동난이란 비참한 도전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1960년대에 착수했던 경제적 근대화의 도전이 성과를 거둬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걸쳐 문화적 수준이 선진국가의 기준에 미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에 우리 사회의 파탄과 쇠망을 경고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세월호 침몰사고’이다. 물론 세월호 침몰을 전후해 이와 유사한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사고보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을 여실히 드러낸 것은 없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고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효과적으로 응전하고 있다는 징후가 거의 포착되지 않고 있다. 감지하기 쉬운 정치나 행정 차원에서의 변화는 적폐청산의 구호만 요란할 뿐 여전히 구태의연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감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사회문화적 차원에서의 변화는 미동도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선진사회로 진입하는 분기점에서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다. 이제는 획기적, 양적, 외형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보다 점진적, 질적,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응전의 방식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변화에 대한 실학적 방법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 실학은 역사적 개념으로는 근대적 지향을 보인 조선후기의 학문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 보면 허학의 상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허학은 겉치레에 몰두하기 때문에 참된 사실의 세계를 호도할 가능성이 높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외모에 치중해 성형수술이 일상화되다시피 한 것도 어찌 보면 허학에 기울어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실학은 이러한 허학을 배격하는 학문이다. 실학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다. 실질적인 사물의 세계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것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다시 봄이 온다. 이처럼 사계절이 어김없이 순행하는 이치를 성(誠)이라 하는데, 이 성의 이치를 인간사회에 구체화하는 것이 성실(誠實)의 철학이다. 이러한 실학의 세계관에서는 아무리 거대한 우주 삼라만상이라 하더라도 그저 작은 이치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따라서 실사구시의 학문은 심오한 이론을 찾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당면한 작은 일 하나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착실히 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깨끗한 세상에 살고 싶으면, 우선 자신의 몸부터 깨끗이 해야 한다. 내 몸이 깨끗해야 내 집이 깨끗해진다. 내 집이 깨끗해야 내 마을이 깨끗해진다. 내가 사는 마을이 깨끗해야 나라가 깨끗해지고 세계도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실학의 세계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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