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가 공공의 물건인데, 어디 일정한 주인이 있는가”

도참사상인 계룡산시대는 계룡산의 지세가 백성이 주인인 새로운 국가의 출현에 적합하며, 정도령이 이를 주관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시대를 주창한 선구자로서 정도전과 정여립의 사상이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국민이 주인인 시대를 의미하며 현재 우리가 갈망하는 시대로서 정도전에 이어 정여립의 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여립의 자(字)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문인으로 사상가, 정치인, 개혁가, 공화주의자이다. 정여립은 서인(西人)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관직을 시작했으나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東人)과 뜻을 같이 하면서 갈등이 시작돼 결국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 진안지역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집념을 가졌다. 또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매월 15일이면 한 곳에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이들 대동계에서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여러 무사, 공사, 천노들로 소속돼 있었다. 이들에게 강론하여 개혁 사상과 애국심을 심어 주고, 혹은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의 무력도 연마시켰다.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로 ‘천하가 공공의 물건인데, 어디 일정한 주인이 있는가’라는 말을 남겨 나라의 주인이 군주가 아니고 민중이라고 했다.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도 주장했다. 이는 누구나 최고 지도자, 즉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기존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대동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본인은 물론 그와 친분이 있는 1000여 명이 죽임을 당하는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큰 정치 사변인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중심에 있었다. 그 결과 진보세력이 몰락하고 수구세력이 계속 득세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민중의 힘을 끌어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차후 동학(東學)에 영향을 미쳤으며 공화주의적 혁명을 실질적으로 기도한 측면에서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계룡산 일대에서 전해지는 정도령에 관한 도참사상이 정도전과 정여립의 실존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들이 남긴 정치 철학과 혁명적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다. 정도전이 갈망했던 재상중심의 백성을 위한 정치와 정여립이 주장한 나라의 주인이 군주가 아니라 민중이라는 내용을 통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의 실천 방향을 일깨우고 있다. 정도전과 정여립이 추구했던 백성을 위한 사랑이 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인식돼 계룡산을 중심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출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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