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준비하다가 은퇴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인터넷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8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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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준비하다가 은퇴

 

2003년 봄 나는 S건설에서 인정받으며 외주구매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영국 회사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나와 같이 일하던 영국인들 중 몇 사람은 한국 사람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있어 언행이 오만했다. 나는 외국회사로 스카우트됐다는 우쭐한 마음에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건방진 영국인들과 다투고 채 2년도 근무하지 못하고 그 회사를 나오고 말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란 말이 정말 맞는 말이다. 그 후 지방에서 건설업을 하는 친척의 회사 서울사무소를 차리고 공사 수주업무를 했다. S건설의 지사장으로 3년 반 동안 영업을 해본 경험이 있었던지라 다행히 1년에 한 두건의 공사를 수주해 그런대로 회사에 기여도 하고 내 월급 값은 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2008년 가을 H건설 해외사업본부장으로 근무하는 조 전무로부터 연락이 왔다. 리비아에 세 건의 큰 공사(공사금액 약 17000억 원)를 수주했는데 해외 현지에 나가 자재 및 장비 구매업무를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조 전무는 S건설의 싱가포르 현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이다. 싱가포르 근무 시 업무적으로는 나와 다투기도 했었지만 그는 내가 맡은 업무를 어떻게 해 나가는지 옆에서 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구매업무를 25년 이상 해 왔음에도 일체의 사욕 없이 깨끗하게 일해 왔던 점에 주목했던 것이다. S건설 본사에서 그가 임원이 되고 내가 외주구매부장이 됐을 때 내가 납품업체와 하도급업체들로부터 접대를 받지 않으려고 골프를 끊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내가 대기업인 S건설 외주구매부장까지 지냈는데 여전히 33평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알고 나의 청렴함에 놀랐다고 한다. 어느 회사든지 구매부장이나 구매담당 임원은 신입사원부터 20~30년 동안 그 회사에서 일 잘하고 사리사욕 없고 깨끗함이 확인된 사람에게 맡긴다. 잘 모르는 외부 인사를 영입해 구매업무를 맡기는 회사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는 나의 능력과 깨끗함을 인정했기에 자신 있게 나를 H건설 사장과 H그룹 회장에게 적극 천거했고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나는 중소기업의 서울사무소에서 급여는 많지 않아도 편하게 근무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회사를 옮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은퇴 후를 생각하면 돈을 벌어 노후자금을 모아야 하지 않겠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를 했다. 중견 H그룹의 H건설에서 임원으로 오라는데 얼마나 좋은 기회냐? 해외 나가서 몇 년 떨어져 지내더라도 노후를 위해 돈을 좀 더 벌어놓아야 하지 않겠냐? 노후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는 국민연금만으론 안 된다, 개인연금을 좀 많이 넣어야 한다는 데 아내와 나는 의견 일치를 봤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동남아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에 좋은 자리가 나왔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못 나갔었다. 내가 해외에 나가겠다고 말씀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해외 나가지 마라. 너 있는 것 갖고 흠뻑 먹고 산다. 나는 내 아들이 더운 나라 가서 고생하고 며느리 좋은 차 타고 다니며 호강하는 것 싫다. 넋 빠진 짓 하지 마라. 인생 금방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어머니는 지금 돌아가셔서 안 계신다. 아버지께 해외 나갈 의향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염려는 하지 말고 나가서 아직 젊을 때 더 벌 수 있으면 벌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간암 투병을 위해 20069월 아버지 어머니는 분당 우리 집 옆으로 이사 오셨다. 20073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도 아버지는 이사 오신 우리 아파트 옆 동에서 막내 동생과 함께 계속 사셨다. 아버지는 6개월 연장해 겨울을 우리 집 옆에서 지내고 26개월 전세계약이 끝나는 20093월 대전으로 이사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고 계셨었다. 아버지는 대전에 둘째 동생네도 있고 아버지 친구들도 있으니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동생들도 아내와 내가 분당에서 잘 모신다고 하지만 놀 친구들 없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대전에서 사시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께서 20049월 간암 3기 진단을 받고 20073월 돌아가시기까지 26개월, 그리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20093월 아버지께서 대전으로 내려가시기까지 분당의 같은 아파트 단지 옆 동에 사시던 2, 합쳐서 46개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를 중소기업의 서울사무실에 근무하게 하셨다. 대기업이나 외국인 회사에서 임원으로 근무하면서는 가족을 위해 또 부모님을 위해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개인 일보다는 회사의 일이 우선이다. 급여는 많아도 아프신 어머니와 홀로 계신 아버지를 모시는데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지방 중소기업의 서울사무실에서는 낮의 근무시간도 저녁시간도 내가 계획한 대로 했다. 그러니 월급은 적지만 암과 투병하시며 약해져 가시는 어머니와 홀로 된 아버지를 시간을 들여 잘 모실 수 있었다. 물질보다도 시간을 들여 사랑을 해야 할 때가 이때였나 보다.

20093월 초 나는 H건설에 입사했고 3월 말 아버지께서는 대전으로 이사를 하시었다. 3개월 후 6월 초 나는 리비아로 나갔으니 얼마나 놀라운 인도하심인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 여정에 리비아에서의 삶을 포함시켜 두셨던 것이다.

리비아는 우리나라와는 문화가 완전히 다른 이슬람 사회다. 사막 기후로 여름 건기에는 한낮이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며 무척 뜨겁다. 마땅한 오락거리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금요일이 휴일이다. 대부분의 건설회사가 그렇듯이 금요일마다 다 쉬는 것은 아니다. 일이 몰려 바쁘게 되면 휴일인 금요일에도 격주로 일을 한다. 어쨌거나 쉬는 금요일 전날 목요일 저녁에 젊은 직원들은 풋살이라는 축구를 하러 갔다. 풋살이란 가로 20m, 세로 40m에 높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세우고 양쪽에 작은 골문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다. 더운 기후에 정규 규격의 넓은 축구장을 뛰어다니며 공을 차면 너무 더워 10~20분만 뛰면 지쳐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이 50대에 들어선 우리들은 몸조심하느라 가지도 않지만 혹 가도 젊은 직원들이 끼워 주지도 않았다. 여름 건기 금요일 휴일에는 바닷가에 나가 수영도 하고 낚시나 그물로 고기를 잡기도 한다(겨울 우기에는 바닷물도 차가워 들어가지 못한다). 저녁 시간에 많은 직원들은 컴퓨터로 영화나 미국 드라마를 본다. 이게 공통적인 오락(?)이다. 이게 일 말고 할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쉬는 금요일 오전에는 교회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방에서나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쉬거나 밀린 잠을 자기도 한다. 해질 무렵엔 근처 해수욕장에 나가 백사장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운동을 한다.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운동은 고사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저녁에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이 글을 썼다.

리비아는 동아건설이 리비아 정부의 역사적 숙원사업인 사하라 사막의 대수로 공사(The Great Man-Made River)198311월 당시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고 금액 32억 불에 따내면서 우리나라에 크게 알려졌다. 리비아 사람들은 그들 나라의 생명줄인 상수도 대수로 공사를 우리나라 건설업체가 맡자 한국의 기술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식했다. 그 당시 동아건설 주가는 천정부지로 올랐다. 동아건설뿐만 아니라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등 한국 건설회사들이 발전소, 병원, 학교 등 리비아의 주요 공사들을 싹쓸이하다시피 수주했다. 우리나라 업체의 건설기술이 최고로 인정받자 자동차와 전기, 화학 분야에서도 우리나라 기술이 최고 수준으로 여겨져 관련 제품들이 대거 수출됐다. 리비아 도로에 운행되는 자동차의 45%, 거의 절반이 우리나라 자동차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과 일본, 미국 차를 다 합친 숫자만큼이 우리나라 자동차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닌가?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외산 차 대비 이렇게 많은 우리나라 자동차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동아건설의 역할이 크고도 컸다. 지금도 리비아 대수로청에 근무하는 옛 동아건설 기술자들은 말한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업이 정치적 희생물이 돼 사라졌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다”, “그 비싼 주식이 휴지가 됐으니 어마어마한 국부가 없어져 버린 것이라고.

나는 구매 전문가답게 회사의 원가 절감에 최선을 다했다. 건설공사의 기초자재인 철근과 시멘트를 아주 경쟁력 있는 가격, 리비아에서 공사를 하는 어느 회사보다도-한국 회사뿐 아니라 터키, 중국 회사 등과도 비교해서도-경쟁력 있는 가격에 구매했다. 철근과 시멘트는 리비아 정부에서 인가한 공기업 한 곳에서 독점 공급했다. 그러다 보니 국제시장 가격 변동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 국제 시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리비아산 제품 가격은 국제시장 가격이 높을 때는 저가였지만 국제시장 가격이 하락할 때는 오히려 국제시세보다 높은 가격이 됐다. 이런 현상을 파악한 나는 리비아 국내산 구입과 터키산 수입을 병행해 최저가 구매를 유지, 회사 원가 절감에 크게 기여했다. 본사 사장과 해외부문 임원이 그들을 찾아와 영업하는 지인들의 업체를 추천하기도 했다. 나는 윗분들이 소개한 업체로부터 견적은 받았어도 최저가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최저가 업체로부터 구매를 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회사의 이익에 최우선을 두고 일했다.

201012월 튀니지에서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청년이 경찰의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튀니지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다른 아랍 여러 나라에서도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리비아에서도 20112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3월이 되면서 당시 리비아 지도자 가다피 지지세력과 반()가다피 세력 간에 전쟁이 격해지자 우리는 리비아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비아에서 근무하던 H건설 전 직원이 201138일 귀국했다. 나는 H건설에 입사해 22개월, 리비아에 나가 근 2년을 근무했다. H건설의 해외공사, 특히 리비아 공사를 위해 입사한 나는 4월 말 퇴사했다.

20113H건설 리비아 공사 현장에서 귀국, 4월 말 퇴사 후 6개월 가까이 놀면서 수많은 회사의 경력직 채용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다. ‘50 넘은 나이에 이력서 쓰는 사람은 팔불출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속으로 비웃을지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201110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말 요행히 나는 E그룹의 E건설에 입사했다. E건설에서 구매본부장으로 최저가 자재 쏘싱(Sourcing) 업무를 맡아 14개월 동안 근무했다. 중국 광저우에 구매 사무실을 설치하고 직원들을 파견했다.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 여러 나라에도 출장을 다니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201212월 말 그룹의 조직이 바뀌면서 나는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20131월 말 퇴직했다.

20132월 사우디에 플랜트 공사를 수주해 해외공사에 처음 진출하는 지방 건설회사 J건설의 구매 및 관리담당 임원 자리를 찾았다. 개인연금보험도 1년 남짓 더 넣어야 하고 노후 여유자금도 좀 모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사우디로 나가 근무하기로 했다. ‘그래, 공사기간도 1년이니 해보는 거다! 30여 년 전 근 3년 동안 사우디 사막 모래바람 속에서 생활했던 나 아닌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니 사우디도 많이 바뀌었을 거다, 1993년 말 내가 입주해 살던 분당이라는 살기 좋은 도시는 25년 전 1기 신도시로 허허벌판 논과 밭, 야산 위에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2012년 말 아버님을 모실 방 한 칸 늘려 이사 와서 지금 살고 있는 광교라는 2기 신도시도 10년 전에는 없던 도시 아니던가? 30년 전의 사우디에 비하면 지금의 사우디는 무척 많이 변했을 거다. 내가 20대 총각 때 근무하던 시절의 사우디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살만 할 거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며 사우디로 출국했다.

제다 공항에 내려 입국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사우디는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사막의 문화는 나무가 심긴 숲이나 산, 농작물이 자라나는 논밭으로 변하지 않는 한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사우디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잘못 왔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바로 귀국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대 가있는 아들이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군대라는 울타리에 갇혀 군 생활을 몹시도 힘들어하던 아들! 아들이 제대하기 전 내가 먼저 귀국해선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아들을 생각하며 사우디의 어려운 생활을 참고 참으며 견뎠다. 아들이 탈영을 할 수 없듯이 아빠인 나도 중도 귀국해선 안 된다고 하루에도 몇 번을 다짐하며 버텼다. 아들이 21개월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5월에 제대했다. 나도 사우디 4개월 근무를 마치고 6월 첫 휴가 때 귀국했다.

귀국을 결심하던 때 나는 대기업 건설사의 중동지역이 아닌 해외현장, 사람이 살만한 지역에 계약직 자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내 나이가 50 중반이 지났지만 S건설 해외현장에서 함께 근무하던 후배들이 여기저기 큰 건설회사의 임원으로 있었기에 그들을 통해 자리를 만들어 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후배들이 본부장이나 임원들이었기에 그들의 아래에 있는 소장들이 한결같이 본부장님(또는 상무님)의 선배님을 제가 어떻게 모시고 일을 합니까?”라는 반응이었다. 나이가 죄였다. 중동이고 어디고 지역이 문제가 아니었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내가 가서 일할 자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100여 군데 이상 이력서를 보냈지만 답이 오는 데는 한 곳도 없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정말 갈 데가 없었다. 50 중반을 훌쩍 넘었으니 더 이상 관리자로서 내 경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 회사 저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는 나를 보고 딸과 아들은 아빠 나이의 사람을 누가 뽑아 주겠어요? 이제는 쉬세요.” 하면서 나를 위로하곤 했다. 일자리를 잡지 못하니 나는 싫어도 은퇴를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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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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