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신 한남대 사학과 명예교수

 

 

이정신 명예교수

◆왜 봉기했나?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선 후 전국적으로 농민 천민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그중 대전은 특산물을 생산하는 소(所)에서 일어난 게 특기할 만하다. 이같은 봉기가 발생한 이유로는 첫째, 고려사회는 무신정권 이전부터 관리의 횡렴과 권문세가의 토지겸병 등으로 농민 생활이 빈곤해지면서 다수 유민이 발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신정권 이전부터 이미 민란이 일어날 소지는 잉태되고 있었는데 이런 현상이 아직 정치체제가 안정되지 않았던 무신정권 초기 대규모 민란으로 폭발하게 됐던 것이다. 둘째, 피지배층의 사회의식이 성장한 점이다. 무신정권 이후 종래 엄격했던 신분질서가 동요했는데 심지어 아버지는 소금장수고 어머니가 사원노비던 이의민 같은 인물도 출세하는 것을 보고 피지배층은 새로운 지배질서를 갈망하게 됐다. 또 소는 금·은·구리·소금·숯·비단 등 특산물을 생산하는 특수행정구역이었다.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고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사회였던만큼 정부는 필요한 물품을 별공 명목으로 과도하게 요구했다. 국가의 맹복적 수탈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소민들의 분노가 명학소민 봉기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봉기과정
명학소는 지금의 대전 탄방동 지역으로서 탄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종 6년 정월에 망이·망소이가 스스로 산행병마사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켜 공주관아까지 함락시켰다. 당시 서북지방 반란이 진압되지 않아 중앙군을 출동시킬 여력이 없던 고려정부는 급히 장사 3000명을 모아 군대로 편성, 남쪽으로 보냈다. 그러나 장사들이 반민들의 위력에 눌려 도망가며 오히려 그들의 기세를 더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반민들은 자신감을 갖고 공주를 기점으로 점차 세력범위를 넓혔고 예산을 거쳐 충주까지 진출했다. 확장되는 이들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정부는 강화를 맺어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러나 진압된 지 한 달이 되지 못해 명종 7년 2월, 명학소민은 다시 일어났다. 그들이 재봉기한 이유는 이들이 홍경원의 주지로 하여금 중앙에 전달하게 한 편지에서 잘 알수 있다. ‘이미 우리의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으로 하여금 잘 다스리겠다고 하더니, 오히려 군사를 파견해 토벌하고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가두니 그 뜻하는 바가 어디에 있느냐. 차라리 창, 칼 아래서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한 포로는 되지 않을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르고야 말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명학소민의 봉기는 단순히 소에서 현으로 승격을 위한 신분해방운동이 아니라 정부타도 의사까지 표명한 반정부의 움직임이 됐다. 이에 고려정부는 회유를 통해 난을 진압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결국 1177년 7월 망이 등이 청주옥에 갇힘으로서 무려 1년 반이나 계속됐던 봉기는 여기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봉기의 의미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는 오늘날의 충청도 전역을 장악, 고려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중부 정권은 명학소민 봉기의 여파로 그 체제가 흔들리게 돼 경대승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됐고 피지배층 봉기가 지배계층을 무너지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정부는 반란이 소민에 한정되지 않고 군, 현민의 동조로 광범위하게 확산된 데에 따라 이들을 진무하기 위해서 각지에 찰방사를 보내 지방관의 탐학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정권자체의 도덕성이나 권세가의 탐학은 그대로 두고 지방관만을 속죄양으로 삼는 자체가 무리였다. 게다가 왕은 찰방사가 압송해온 장리(贓吏) 35명을 즉석에서 풀어줬으며 나머지도 불과 수년 내에 모두 사면해 복직시켰다. 결국 농민, 천민 등 피지배층이 목숨을 걸고 봉기한 댓가는 유명무실해졌고 지방관의 탐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두번째 조처는 권세가의 토지침탈 방지, 공부(貢賦)의 균등 배분, 조세 탕감 등의 경제적인 배려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조리가 정부의 일시적인 시행령만으로 해결되긴 어려웠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로 인해 정부는 농민층을 인식하게 됐고 피지배층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요구사항을 강력하게 표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 이를 계기로 향, 소, 부곡 등이 점차 해체의 과정을 겪어 고려 말기엔 이것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고려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명학소민의 봉기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의 봉기에서 또 하나의 의미는 망이라는 소 출신의 지도자가 나왔다는 점인데 이는 이후에 일어났던 ‘사노 만적의 난’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판단된다. 지금도 둔산 남선공원에는 명학소 망이·망소이 민중봉기 기념탑이 세워져 있어 옛 시절을 기억하게 해 준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