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찾아온 건 달갑지만은 않다. 당초의 계획과 달리 흐르는 현실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항상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라면 평상시보다 더욱 배가 될 수 있다. 이번 5-1구간이 그랬다. 뜻하지 않게 당초 목적지와 달리 발걸음이 옮겨졌지만 오히려 정형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누구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이, 그리고 그것이 신록과 만나 하나의 예술처럼 승화됐다. 대청호오백리길이 주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꼭꼭 숨은 절경, 뜻하지 않은 즐거움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엔 하나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정식 구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빼놓으면 아쉬운 절경이다. 그래서 5-1구간으로 지정됐다. 당초 목적지는 이곳이었고 5구간 종료 지점이었던 방아실 입구에 섰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을 찾는 것이 5-1구간의 시작이다. 고해산(苦海山)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친절히 시작을 알린다.

고해산은 약해산이라고도 불리는데 하나의 설은 과거 일제강점기로 한자표기가 한글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설에 따르면 원래 고해산은 약해산(若海山)이었는데 한글로 지명을 바꿀 때 담당자가 ‘약(若)’을 ‘고(苦)’로 잘못 읽어 고해산이 됐다. 이후 고해산의 한자를 찾을 때 담당자의 실수가 발견돼 약자와 비슷한 한자가 선택됐고 결국 지금의 고해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뜻밖의 해석이 될 수 있다.

고해라 하면 불교에서 쓰이는 속세용어로 괴로움이 많은 바다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불교국가였던 백제가 이곳을 다스릴 때와 연관 지어 해석하자면 이곳을 올라 고해를 떨치고자 했을 수 있다. 특히 현재 고해산의 정상은 200m가 채 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어 고해를 잊고자 많은 이들이 찾은 산으로도 볼 수 있다. 나름의 긍정적인 해석을 갖고 고해산에 첫발을 내딛으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각이 바로 운동화 밑 발바닥에서 전해오는 푹신함이다. 고해산은 소나무가 많은데 최근 내린 비로 내려앉은 솔잎이 하나의 융단 같은 느낌을 준다. 발이 편해지니 걸음에 거침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게 실수였다. 꾸준히 걷다 지친 ‘같이 가요. 대청호오백리길’을 안내하던 이정표를 단 한 번도 고해산에선 보지 못했다. 무심코 지나쳤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과 편안해진 발걸음이 나도 모르는 곳으로 안내하기 시작한다. 어느덧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인지했지만 방향감각은 푸른 신록 안에 갇혔다. 다만 당장 눈에 들어온 이 길을 따라 가기 시작할 뿐이다. 고개 너머 하늘은 소나무의 푸름에 갇혀 그 어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좀처럼 더워지지 않고 발은 푹신해 발걸음은 보다, 그리고 더욱 빨라진다. 소나무 숲 너머 얼핏 보이는 대청호가 보인다.

숲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질 때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소나무를 액자로 두른 듯 대청호의 절경이 펼쳐진다. 대청호의 푸름이 정면에서 펼쳐진다면 뒤편에선 신록으로 둘러싸인 푸른 산이 눈을 편안케 한다. 대청호와 산이 주는 시각의 편안함에 시야를 어디에 둘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소나무 숲 사이의 대청호는 아담하면서 수려함이, 푸른 하늘에 푸른 산은 담백하면서 웅장함을 제공한다.

원래 계획했던 5-1구간이 어디인지 휴대전화를 들고 검색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색에 빠지게 한다. 당초 계획대로 향했다면 이런 절경을 볼 수 있는 행복을 느꼈을까? 뜻밖의 여정이 주는 즐거움이 평소의 대청호를 더욱 감동 있게 꾸며준다. 대청호와 산이 주는 아름다움에 충분히 빠진 뒤 다시 부는 바람에 떠밀며 행복한 나그네가 된다.

◆자연이 선보이는 신록과 하나 된 대청호의 끝자락

어디로 향하는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이 계속되지만 마음은 오히려 갈수록 편안해진다. 아니, 뜻밖의 선물이 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한껏 고조된다. 들뜬 마음에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소나무 숲은 이내 아카시아 숲으로 변모한다. 아카시아향의 시원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꽃가루의 간질임이 아닌 아카시아 특유의 강한 간질임이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한다.

아카시아향이 코에 들어가 재채기로 나올 만 하지만 이 향을 어떻게든 담고자 숨을 잠시 참아본다. 강력한 아카시아 향은 꿀벌까지 끌어들이며 한껏 고조된 자신의 순백함을 나그네들에게 자랑한다. 처녀의 순결함처럼 새하얀 자태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게 하지만 강력한 향과는 다르게 조용히 자신의 존재만을 알리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모습 때문에, 그리고 손만 대도 으스러질 듯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저 눈으로 즐긴다.

그렇게 아카시아 향에 취해 길을 걷다 뜻밖의 여정이 주는 즐거움이 나타난다. 봄과 여름 사이에 자연이 주는 최고의 신록을 한껏 머금은 대청호의 가장자리가 눈앞에 나타난다.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마저 대청호 안에 가둔 듯 이곳에선 모든 사물이 조용히 그저 자리를 지킨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이는 대청호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에 맞춰 묶여진 작은 배, 강력했던 아카시아 향의 은은함까지 한 곳에 어우러진다.

아담하면서 수려한 대청호와 담백하면서 웅장했던 산이 주는 즐거움까진 아니지만 작은 행복함이 온 몸에 퍼진다. 대청호 가장자리를 지키는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자기의 영역에 몰래 들어온 적(?)에게 거세게 거부의 뜻을 밝힌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던가. 대청호를 찾은 방문객이 한량인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가까이 다가오면 물어죽일 것처럼 짖던 강아지들은 적이 막상 다가오자 꼬리를 흔들며 오히려 반긴다. 매일 이곳을 지키며 알려지지 않은 절경을 독점하다시피 한 두 마리의 강아지가 살짝 미워진다.

작은 행복함에 흠뻑 젖었지만 이를 뒤로하고 발걸음에 다시 채찍질을 가하면 이번엔 자연스럽게 정돈된 흙길이 나와 희열을 준다. 더 이상 숨겨진 절경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계획되지 않은 여정이 곧 종료될 거란 희열이 앞선다. 아카시아 나무를 근위병 삼아 올게 곧은 길은 나그네를 방아실 입구로 안내한다.

솔잎의 푹신함만큼은 아니지만 흙길이 주는 편안함이 발바닥 전체에 느껴진다. 사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단 사실에 몸과 마음은 평상시보다 더 많이 지쳤지만 흙길의 마지막이 지친 심신을 충분히 어루고 달래준다. 흙길은 이내 사라지고 이번엔 포장된 작은 인도가 나온다. 이제 곧 지방도 571번과 만나 방아실이 나올 거란 신호다. 5분 남짓 걸으면 신록을 빠른 속도로 뚫는 차량의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뜻밖의 여정은 종료된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작은 힐링을 느낄 수 있었다. 뜻밖의 여정이, 그리고 대청호오백리길이 주는 선물이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노승환·김현호·정재인 기자
영상=정재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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