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가양동 집을 팔았다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인터넷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8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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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가양동 집을 팔았다

아내와 나의 눈물과 땀, 그리고 아내도 나도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샀던 대전 가양동 집은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팔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상황이 갑자기 어려움에 빠지자 아버지 어머니의 장사가 안 되고 수입이 절벽이 되었다. 살림이 급격히 어려워지자 버티다 못해 아버지 어머니는 결국 그 집을 팔았다. “나중에 이 집이 너의 것 되지 누구 것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던 어머니도 IMF 외환위기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집은 부모님이 17, 동생들이 결혼하고서 각자 집들을 장만해서 나갈 때까지 모두 잘 산 집이었다. 나의 25개월 해외 급여와 2년 동안의 보너스가 몽땅 고스란히 들어간 집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1984년 봄 3200만 원에 사서 2001년 여름 8700만 원에 팔았다. 그 집을 팔고 아버지 어머니는 나에게 3000만 원을 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5700만 원을 갖고 IMF 외환위기 때 진 빚을 갚고 나머지는 노후 생활비로 사용하였다. 내가 받은 돈 3000만 원에서 1200만 원은 그 집 팔고 부모님이 이사 들어갈 성남동 6차선 대로변 2층집을 수리해 드리는데 들어갔다. 그리고 800만 원은 부모님 차 사드리는데 들어갔다. 겨우 1000만 원만이 우리 수중에 들어왔다.

내가 그 집 사러 싱가포르로 나가면서 아내에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나 2년만 더 해외 나갔다 올게. 2년만 떨어져 살며 고생하자. 그러면 집 한 채 살 수 있어. 당장은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겠지만 나중에 그 집이 누구 것이겠어? 결국 우리 것이잖아라고 했던 말은 사기가 되고 말았다. 싱가포르의 같은 현장에 근무하던 김 대리는 싱가포르로 나오면서 아내는 친정으로 보내서 편히 살게 하고 같은 금액의 돈으로 여의도에 아파트를 사서 지금은 10억 원이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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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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