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때 이른 무더위로 꽃들이 한꺼번에 함성처럼 벙그러지며 오월이 시나브로 가고 있다. 아까시의 짙은 꽃내음, 잎새에 숨은 연녹색 목백합의 은은함, 두둥실 떠오르는 작약의 화사함이 각기 자태를 뽐낼 틈도 없이 그렇게 계절의 여왕이 슬그머니 뒷걸음치고 있다. 그래도 꽃향기보다 더 진한 손자들의 웃음소리, 장성한 자녀들이 품안으로 찾아드는 어버이날의 뿌듯함, 깊이 간직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날 등 뜨거운 사랑이 충만한 오월은 그 얼마나 깊고 그윽한가.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까지 손자들 넷과 기쁨과 탄식 속에 숨가쁘게 보내고, 오래 전부터 친구들과 계획한 ‘고교 시절 은사님 뵙기’ 모임을 위해 딸네가 살고 있는 용인 수지로 갔다. 고교 2학년과 3학년 담임이셨던 박영수 선생님이 기흥에 사시기 때문이다. 딸네와 한동네에 사는 근성이가 친구들을 흔쾌히 마중하기로 했다.

빗속에 나서준 근성이 차로 광명역에서 광주에서 온 영석이와 서울서 온 관수를, 다시 수원역에서 부산에서 온 준수를 태우고 선생님 댁 근처에서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선생님이 뇌경색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말이 어눌하시기 때문에 식사 후 선생님 댁을 찾았다. 학창 시절 군살 한 점 없이 날렵한 몸매에 톡톡 튀는 명석함으로 우리들을 기죽게 했던 선생님이, 이젠 80대 중반의 바스러질 듯한 노인이 돼 소파에 기댄 채 우리를 기다리고, 무용 선생님이었던 사모님께서 문 앞까지 나와 따뜻한 악수로 맞으셨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뵌 선생님은 30대 중반의 빛나던 모습이었는데, 어느덧 제자들이 흰머리의 법적 노인이 되어 찾았으니, 어찌 모두 감격하지 않겠는가. 선생님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선생님은 화학을 가르치셨는데 분필 하나만 달랑 들고 오셔서 가끔씩 은단을 씹으며 요점만 콕 집어 설명하셨다. 기독교 종립학교였지만 담배를 즐겨 늘 은단향을 풍기셨다. 날렵한 몸매에 서슬 퍼렇게 주름 잡힌 와이셔츠를 입고 바퀴가 가는 자전거로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일본 특유의 권법인 당수(唐手)를 익혀 긴 다리가 머리 위로 휙휙 날아올랐다. 오후 4시면 일과가 끝나던 시절이라 담임선생님들끼리 찹쌀도넛 내기 학급 대항 배구 시합을 자주 했다. 우리 반이 늘 이겼는데 당시 반장으로 나이가 많던 석신이의 힘찬 스파이크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기 시합이라 응원이 뜨거운 만큼 판정 시비에 날이 서고 급기야 담임선생님 간의 다툼으로 비화되기도 했는데, 그때 선생님의 현란한 당수 솜씨를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 선생님보다 젊은 선생님이 바람을 가르는 발차기에 속절없이 쓰러졌고 퍼렇게 멍든 눈두덩을 한동안 진한 선글라스로 가렸던 기억이 새롭다.
선생님은 의리를 아는 협객이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는 수학 선생님이 질병으로 수업을 못하게 되자 대신 수학까지 가르쳤는데, 전공인 화학처럼 분필 하나로 숫자까지 외워온 수학 문제를 한달음에 풀고 설명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당당하던 선생님이 가느다란 다리를 보조의자에 얹은 채 그윽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며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우리 반은 문과였는데 스스로 이과 공부를 해 의사가 된 채식이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우리도 금세 따라 합창했다. 고교 시절 열심히 불렀던 ‘등대지기’, ‘사랑해’ 등을 부르자 선생님도 가만가만 따라서 부르셨다. 흥이 오르자 사모님 요청으로 학창 시절 찬송경연대회에서 부르던 찬송가를 4절까지 기타 반주에 맞춰 불렀다. 이제 쇠잔한 모습이지만 퇴색한 추억을 더듬어 함께 노래를 부르다 보니 모두가 다시 빛나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이 뜨거워졌다. 퇴직하고 남원에서 농사를 짓는 세재도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모았다.

유명한 극작가인 구홍이는 재롱이나 떨 것이지 뜬금없이 찬송가를 불러 선생님을 울린 친구들을 시끄러운 예수쟁이들로 탓했지만 젊은 시절 선생님 모습을 초상화에 담아 사모님께 드렸고, 함께하지 못한 영식이는 멀리서 케이크를 보냈다. 촛불이 꺼진 뒤 선생님과 사모님을 안아드리며 내년을 기약하며 집을 나섰다. 빗소리가 한결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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