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우 공주대 교수

 

이달우 교수

흔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는 것은 학습이다. 배우고자 하는 본능이나 의지가 없다면 아마도 인간사회와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학습의지를 돕기 위한 직분으로 생긴 것이 가르치는 일이다. 그래서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이다. 교학상장이라고 하지만 가르치는 일을 하는 스승 쪽에 비중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가 만나서 같이 살아가는 자리에 스승의 은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자의 덕분도 있어야 하고 또 실제 그러하기도 하다. 스승의 은혜와 제자의 덕분이 잘 어울리는 것을 보았을 때 사제동행(師弟同行)이라고 이름 짓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공자는 제자가 3000명이나 됐다 하고, 소크라테스도 많은 제자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제자가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례는 많다. 그런가 하면 스승 또한 제자를 잘 만나야 한다. 제자가 많아야 좋은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뛰어난 제자를 만나야 한다. 제자를 잘 만나 큰 덕을 본 것으로 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보다 좋은 예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는 70 평생을 사는 동안 어떠한 저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서양철학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수많은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이 남아 있다. 플라톤이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 대화편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가 누군지도 모를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같은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소크라테스의 실존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요컨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보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만난 것이 소크라테스를 위해서나 서양철학 또는 인류문명을 위해서나 참으로 위대한 축복이 아니겠는가.

평범한 제자도 있다. 크세노폰(Xenophon)은 소크라테스의 ‘회고록(Memorabilia)’을 남겼다. 물론 크세노폰도 플라톤에 비해서 평범한 제자라는 것이지 결코 녹녹지 않은 비범한 제자임에는 틀림없다.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Xanthippe)가 악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지만 크세노폰이 기록한 내용에 영향을 받은 점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크세노폰이 회고록에서 스승의 부인인 크산티페에 대해 사납고 거친 여인으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크세노폰의 말이 씨가 되어 크산티페가 세계적인 악처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 셈이다. 크산티페가 현모양처였다는 학설도 있으니, 그 학설이 맞는다면 현모양처인 크산티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못난 제자로는 알키비아데스(Alcibiades)가 있다. 귀족 출신인 알키비아데스는 총명하고 준수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사욕을 이기지 못하고 아테네를 정쟁(政爭)의 소용돌이에 빠뜨렸으며, 결과적으로 30여 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망하는 결과를 초래한 인물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하게 되면 독사에 물리거나 전기메기에 쏘인 것과 같은 통증을 느낀다고 하였다. 사욕에 눈이 먼 알키비아데스에게는 진리와 공공의 세계에 헌신하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를 제자로 생각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제자도 스승을 잘 만나야 하지만 스승도 제자를 잘 만나야 하겠다. 스승의 은혜로 크는 제자가 넘치고 제자의 덕분으로 도움을 받는 스승이 많아진다면 이보다 고맙고 아름다운 일이 없을 것이다. 문득 나도 플라톤 같은 제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와 동시에 과연 나는 언제 내 선생님의 플라톤이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생각 끝에 남은 생각은 사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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