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네 살 난 내 외손녀는 자기 언니가 학교에 가게 되니 바로 그 다음해에 자기도 학교에 갈 것이라고 주변에 있는 유치원 친구들에게 큰 소리 치고 다닌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아이의 엄마도, 나도, 내 아내도 한참 웃었다.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고 그럴 리는 없고, 언니가 갔으니 자기도 그렇게 가게 될 것이라고 들떠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하기는 내가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동네 아이들이 들떠서 우리 집에까지 와서 빨리 학교에 가자고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간 학교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주는 곳이었을까? 아주 낯선 곳이었을까?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매우 높은 측에 속한다. 특히 청소년과 노년층의 자살률이 참으로 높다. 왜 그러할까? 무엇인가 불만족스러움이 가득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특히 내가 다시 청소년이 되었다고 여기면서 이런 생각을 모아본다. 나무나 풀, 나비나 새, 물고기, 개나 고양이, 들짐승이나 집짐승들도 자살하거나 자살충동을 느끼면서 살까? 삼계탕에 들어가기 위하여서, 보신탕용이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나서, 또는 하루 종일 묶여서 살아야 하는 개나 장 속에 갇혀 사는 닭들은 그 삶이 의미가 없고 괴롭다고 자살하고 싶을까? 동물학자들이나 식물학자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강력한 자살충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을 교육으로 바꿀 수는 있는 것일까? 적어도 학생들의 자살을 막을 수는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이미 이 세상에 불평등하게 태어난 인생이지만, 그래서 또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다가, 불평등대접 속에서 죽어가는 인생이지만, 이것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평등에 가깝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재산이 없고 있고를 떠나서, 지위가 높고 낮고를 떠나서, 몸이 튼튼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이 예쁘다고 하거나 아니거나를 떠나서 그냥 나는 나다 하면서 제멋에 살 수 있는 사회는 없을까? 나는 이런 것이 싫었다. 학교에서 줄을 맞추어 구령에 맞추어 맞지도 않는 발을 맞추어야 하는 것, 조회시간에 교훈을 듣는 것이 싫었다.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 몰려 있다가 상급반 언니들이 다 함께 몰아서 줄을 맞추어 학교까지 가는 것이 싫었다. 시험보기가 매우 싫었고, 또 시험을 본 다음에 성적에 따라 칭찬과 걱정을 듣는 것이 싫었다. 잘한다고 상을 주고 못한다고 벌을 주는 것이 아주 싫었다.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갈라서 모멸감을 주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아이들을 노리갯감으로 알고 골리는 선생들이 매우 싫었다. 그런 선생 앞에 무엇인가를 갖다가 바치면서 차별대우를 벗어나보려는 아이들의 행동이 싫었다. 더욱이나 아이들을 슬리퍼나 막대기 또는 손바닥으로 머리나 얼굴을 때리는 선생은 선생이라는 것을 떠나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이 미웠다. 옷은 왜 꼭 같이 입어야 하는지(교복과 모자와 모표와 배지 또는 학년표시 그리고 명찰), 더욱이나 체육복은 왜 꼭 같은 것으로 해야 하는지가 몹시 싫었다. 지금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예쁘기도 하지만 답답하다.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냄새가 너무 짙게 풍기기 때문이다.
아주 싫었던 것은 상급학교를 시험을 보아서 가는 것이었다. 자기가 다닌 학교에서 여러 번 시험을 거쳐 점수가 나왔는데, 또 각각 다른 시험을 보아서 합격과 불합격을 따진다는 것이 싫었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예비고사, 수능시험을 보아서, 그 점수에 따라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 아주 탁월하게 지저분한 입시 제도를 없애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개혁한다는 것이 겨우 문제를 얼마나 쉽고 어렵게 내는가를 조절하려고 한다. 거기에 선별된다고 좋은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어린 생명들을 그것에 목이 매여 자유롭지 않은 학창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말로는 각자 가기가 타고난 소질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서, 왜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시험문제에 울고 웃어야 하는가? 원래 교육은 낙오자가 없는 것, 모두가 다 자기 나름의 자부심과 삶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한 잣대로 비교하는 교육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보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과 놀기를 잘하는 나를 어느 특정한 잣대로 재어 판단하는 교육이 있는 학교에는 가고 싶지가 않다. 그렇게 하여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매일 재재거리고 해해거리면서 함께 놀던 동무에게 열등감을 가지게 하는 학교에는 가고 싶지가 않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일정한 과목을 배우면 함께 진급하거나 졸업하는 것도 마땅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더욱이나 선후배라는 위계체계는 참으로 싫다.
나는 어떤 학교에 가서 어떤 과목을 배우고 어떤 직업을 선택하여 살겠다는 것을 고민하는 것보다는, 내 품성을 풍부히 하고, 우주를 숨쉬며, 긴 역사의 호흡을 따라 가보는 교육, 특정한 시간에 맞추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한까지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여 스스로 만족감을 찾게 하는 그런 곳에 내 몸과 맘을 던졌으면 좋겠다. 나를 온전한 인격으로 보는 교육이 있는 곳이면 좋겠다. 내가 도구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 살기 위하여는 어떤 정신자세를 갖추고 인간됨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를 서로 토론하고 살아가는 훈련을 쌓는 곳에 가면 좋겠다. 크거나 작거나 무겁거나 가볍거나 검거나 희거나 그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는 곳에 가고 싶다. 먹고 마시고는 걱정을 하지 않고, 등록금을 부모가 내지 않는 곳이면 좋겠다. 교육감을 선출하는 데 이런 것들이 좀 생각으로 모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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