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 예로 중세의 한 교황의 딸 루크레치아가 시집 갈 때 30만 두카텐(당시의 돈 단위)을 지참금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가 대학교수로서의 일년치 월급이 8두카텐이었다고 하니, 30만 두카텐은 다시 300억으로 봐도 될까? 하기야 교황의 딸이니 이런 돈쯤이야... 물론 두카텐과 굴덴의 돈 가치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냥 현대의 달러와 유로로 유사하게 본다면 말이다.

각설하고, 아무튼 사촌 조카가 드디어 이 집안의 사위가 되었던 거였고, 반대로 사촌 질녀가 드디어 이 왕족의 며느리가 되었다. 결혼 후 약 일 년이 지났다. 엘리자벳이 겨우 17살이었을 때 첫딸 소피 프리데리케를 낳았고, 다음 해엔 둘째 딸 기젤라를 낳았다. 이런 그녀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다가왔는데 자기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품에 둘 수 없었다는 거였다 우리로 치면 이모이자 동시에 시모인 소피 때문이었다. 애 키우기에는 너무 젊다는 이유로 시 엄마 소피는 애들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 양육하였던 터다.

시시가 애들의 얼굴 한번 보는 것도 늘 시모 소피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정도였고, 설령 엘리자벳이 아이들을 만났다 할지라도, 소피의 감시(?)아래서만 가능했다.

하여튼 시모 소피의 이런 지나친 보호가 싫었던 그녀는 갖은 구실을 대고선 아이들을 데리고 더러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소피의 눈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아이들을 혼자 품에 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헝가리로 여행 가는 도중에 두 딸이 설사와 열에 시달렸다. 10달 되었던 기젤라는 다행히도 살아남았지만, 2살짜리 소피는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양태자 박사

1858년 시시는 왕세자 루돌프 프란츠 칼 요셉을 낳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이 아들을 시모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아니 빼앗겼다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근데 시모는 이 왕세자 루돌프를 어릴 때부터 군인식으로 교육을 시켰다. 한 예를 들자면 아침에 손자 잠을 깨울 때는 더러는 차가운 물을 부어 깨우라고 보모에게 하달 할 정도였다. 이런 군인식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아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그녀였지만, 어떻게 시모 소피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예민하게 성장했던 루돌프는 후에 불행하게도 여자 친구 메리 베제라와 함께 1889년 한 城에서 자살해 버렸다. 엄마로서 너무나 가슴 아파했던 시시는 그 후 자주 검정 옷을 입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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