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스 신화

교통의 중심지 코린토스(Corinth)

건축을 하거나 도시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위치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위치였다. 그리스에서 위치로는 코린토스만한 곳이 없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코린토스를 지나야하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혹처럼 그리스 남부에 달려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고대 그리스의 에덴동산이었다. 스파르타(Sparta) 역시 반도의 밀농사가 만든 국가였다. 최근 운하를 뚫어 섬이 됐으나 고대에는 분명 반도였던 곳이었다.

1981년부터 2년간 약 6.3km의 암반을 깨내 코린토스 운하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그리스 동부 에게 해(Aegean Sea)에서 서부 이오니아 해(Ionian Sea)까지 가는 700km가 단축됐다.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완공했으나 그 어마어마한 계획은 이미 이전에도 수차례 있었다. 카라굴라 황제의 꿈이었고 네로(Nero)의 미래였으며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기술자 레셉스(Lesseps)는 이집트 수에즈 운하(Suez Canal)를 만들던 기술로 완공했고 공사 하나했을 뿐인데 야심 있는 고대 황제들을 상대로 완승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어마 무시한 운하는 폭 24m, 깊이 8m로 운하치곤 규모가 작다. 겨우 소규모 공사만 완료해 관광용 유람선만 지날 정도다. 그래서 작은 배가 거대한 배를 끌고 가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풍경만큼은 기가 막힌다.

배를 옮겨드립니다

고대에 코린토스가 중요했던 이유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이 아니라 코린토스 서안에 신탁의 땅 델포이(Delphi)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폴리스의 참주들은 델포이가 보여주는 미래를 알고 싶어 했고 그 땅은 합당한 재물을 원했다. 금은보화로 장식된 봉헌품은 조심스레 옮겨져야 했으며 가능한 빠르게 도착해야 했다. 그 간절한 바람은 기막힌 발상을 이끌어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거짓말처럼 겨우 7km의 좁은 지협으로 본토에 맞닿아있다. 심지어 눈으로도 끝과 끝이 맑게 보인다. 눈으로 보기에도 짧으니 어느 누구든 뚫어보겠다고 곡괭이를 내리 찍었던 것이다. 그러나 쇠만큼 강한 암반은 갈라질 생각이 없다. 그러자 코린토스 사람들은 배들 들어 올려 바퀴로 이동시켜 반대편에 내려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시간동안 뱃사람들은 먹고 즐기며 피로를 풀면 그만이었다.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코린토스는 최적의 휴식을 제공했다. 코린토스를 지키는 신은 신기하게도 아프로디테(Aphrodite). 표독스럽고 제멋대로인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폴리스는 그가 태어났다는 키프로스(Cyprus)와 코린토스뿐이다. 정말 예뻐서 봐 준거지 배울 점이라곤 눈곱만큼 없는 신이었다.

그런 아프로디테를 모신 이유가 뭘까, 그건 간단했다. 아프로디테 신전의 신녀들은 1000명에 달했고 미모도 상당했다. 게다가 전도를 몸으로(?)하는 통에 선원들이 성스럽게 감동했다고 한다.

이런 신성모독이 있을까 싶지만 종교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이 있고나서 있다. 그 결과 선원들 사이에선 모든 배가 코린토스로 가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겼단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다는 말이다.

코린토스의 멸망

민과 관과 종교의 합심으로 코린토스는 날로 번성했다. 이 지역 번성함이 극으로 달해 예술 양식 중에 코린토스양식이 생겼다. 아칸서스 잎을 조각한 화려한 기둥양식을 두고 이르는 말인데 그리스뿐 아니라 지중해, 유럽까지 퍼져나갔다.

사람이 몰려드니 전도자도 밀려 들어왔다. 기원후 51년 전도여행을 왔던 바울(Paul) 사도는 번성했으나 환락가였던 이곳을 저주했다. 결코 이곳엔 교회가 생길 수 없다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성경에 고린도서(Corinthians)가 있는 것으로 눈치 챘겠지만 고대 교회의 살아있는 증거가 됐다. 7년 뒤 바울이 코린토스에 방문해 문안하고 축복했다.

이렇게 성과 속은 함께 존재했다.

이래저래 유동성 뛰어난 울타리를 치고 어떤 문화도 유연하게 받아내던 코린토스는 기원전 146년 북부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o)와 함께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지도에서 살아질 만큼 버림받았다. 유명한 로마의 응징이었다. 돌 위에 돌을 두지 않고 소금을 뿌려 곡식도 자라지 못하게 했다. 찬란한 문화 뒤 철저한 앙갚음은 필수였다. 우리나라도 국정원이 있지 않은가.

다행히 기원전 44년 카이사르(Caesar)에 의해 재건 명령이 내려졌으나 그 뒤 두 차례 거대한 지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린토스의 신화와 유물이야기는 2편에서 이어가겠다.

·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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