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대망새의 통치④

일단의 의식이 끝나자 여자와 짝을 이뤄 살지 않은 젊은 남자들이 모두 나와 겹겹이 바위를 둘러쌌다. 잠시 후 맨 가운데 줄에 있는 남자들이 격렬한 춤을 춘 뒤 땅바닥에 넙죽이 엎드렸다. 그런 행동은 다음 줄로 계속 이어져 마치 도미노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성단의 음식들은 모두 쓸어 모아 바위 밑에 묻었다. 참으로 길고 진지한 의식이었다. 백성들은 이 의식을 통해 자신들의 바가나치가 앞으로 이끌어나갈 세상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이 의식은 또한 개인의 필요에 따라 섬길 대상을 선정해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던 개별신앙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나아가 바가나치라는 공식적 신의 사제를 통해 국가를 보호하는 신과 직접 교감하고자 하는 종교적 차원의 신앙문화로 변화를 이끌었다. 이 의식은 과거 팬주룽에서 가장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댕글라의 어구가 곰의 사제역할을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신앙의 형태였다. 이러한 형태의 신앙문화도 바위무덤처럼 노고록의 북방을 거쳐 세계만방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공활한 하늘과 청명한 날씨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바람이 제법 깊어졌다. 바가나치가 된 대망새는 백성들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분야별 바담들에게 면밀한 지시를 내렸다. 푸른돌은 바가나치의 뜻을 받들어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했다. 식량을 맡은 궁둥백은 눈만 뜨면 산으로가 동물들을 사냥했다. 궁둥백이 가죽을 벗겨 모대기에게 주면 모대기는 빼어난 솜씨로 옷과 신발을 만들었다. 올바는 동물의 뼈와 살을 발라 뼈는 화살촉과 옷을 지을 바늘, 낚시 바늘 등을 만들었으며 살은 잘 말려 저장창고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도멕은 땔감을 장만하고 갈대와 억새 등을 엮어 움집을 감쌌다. 각 분야별로 책임자를 두니 일은 일사천리로 척척 진행되었다. “……”

겨우살이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자 군사들을 훈련하던 소리기가 대망새와 그 가족들이 기거하는 곳을 찾았다. 검맥질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커다란 집, 팬주룽의 대궐인 두루봉이었다. “바가나치! 바가나치께서 명령하신 겨우살이 준비도 거의 된듯하니 들판으로 산책이나 나가시지요.”

“소리기, 우리끼리 있을 땐 편하게 말하기로 하자아!” 대망새가 산드러지게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면 질서가 안 잡혀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소리기가 정색을 하며 완고하게 부인했다. 대망새는 알았다는 듯 벙글벙글 웃으며 소풍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바가나치가 출타를 한다고 하자 신료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대망새가 아무리 만류를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록 가벼운 산책이라 해도 국왕의 행차였던 것이다. 국왕의 행차에는 미리은은 물론 아까비, 올바의 여자 비발 등 신료들의 여자도 동반하였다. 검맥질의 집들 사이로 반듯한 길들이 닦여 있었다. 대망새는 남북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백성들이 와글와글 몰려들어 바가나치를 숭배했다.

검맥질의 들판은 널따란 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강은 군데군데 다리를 놓아 건너기가 편리했다. 도구를 맡은 바담인 올바의 작품이었다. “참으로 편리하고 정교한 다리를 놓으셨군요?”

대망새가 올바를 칭찬했다. 올바는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미리은을 가볍게 쳐다봤다. “고맙습니다, 바가나치. 그런데……, 이제 결혼식을 하실 때가 된 것 아닙니까?”
“겨, 결혼식이요?” 올바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망새가 당황을 했다. 특별한 혼례의식 같은 것을 보지 못했던 대망새로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지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러자 재기가 말했다. “팬주룽의 바가나치가 되었으니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냥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에 걸 맞는 의식이 있어야지요.”

재기의 말에 겸연쩍었던 미리은은 기름진 땅에서 쑥쑥 올라온 배추와 갓, 겨자 같은 풀들을 살랑살랑 건드리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대망새는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기만 한 미리은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멀리 하늘과 땅의 경계로 눈을 돌렸다. “그렇다면 소리기 장군도 결혼식을 해야 합니다. 아니, 이번 기회에 짝을 이루지 않은 처녀 총각들의 합동결혼식을 올립시다.”

신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돋우어 바가나치의 제안에 찬동을 하고 나섰다. 팬주룽의 합동결혼식……, 이 행사는 특별한 의식 없이 그냥 합쳐서 살던 오랜 관습을 깬 결혼문화의 획기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합동결혼식이라는 신선한 충격으로 검맥질의 너른 들판에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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