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으로 촬영한 내탑 수영장 터.

웃여울 아랫여울 천렵하고 멱 감던 곳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마음의 고향

애끓는 망향과 눈물은 충청인의 젖줄로

 

 

한국이 1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과거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당시의 젊은이들이 희생했기 때문이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전쟁 현장으로 향한 군인, 중동으로 떠난 건설 노동자. 그들은 그저 묵묵히 대의를 위해, 미래를 위해 자신들을 내던졌다.
대청호가 생기기 이전 그곳에 살던 주민들 역시 큰 대의를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다. 충청권 식수 제공이란 명분에 대청댐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터전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느낀 상실감은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을까.
오늘 물을 마시기 전 당시 대청호에 살았던 주민의 희생을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자. 지금 마시는 물은 그날의 수몰민이 흘린 눈물이었니 말이다.

 

물에 잠긴 학교 운동장 (1980년 7월)

 

대청호 완공후 물에 잠긴 내탑 마을. 사진은 수몰민 김의중 씨의 필름 카메라 스캔.

◆ 아름다웠던 내 동네
1968년 모기가 슬슬 날아다니기 시작한 6월 어느 날.
“야. 김의중. 들었어? 우리 동네에 수영장이 생긴댜.”
불알친구 한 녀석이 막 달려오더니 말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호흡이 가빠져 숨고르기가 필요해 보였지만 이 녀석은 수영장이 생긴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었나보다.
“너 우리 마을 청년회장이잖어. 사람들 많이 오면 수영복 빌려주는 장사나 하자.”
솔깃했다. 우리 마을에 수영장이 생긴다…. 분명히 사람들이 많이 오겠지. 솔직히 우리 마을이 좀 예쁘니까. 모래사장은 바닷가보다 더 고운 은모래같고 강물은 말 그대로 비단같이 아름다우니까. 옆 동네 신탄진수영장보다 더 예쁘면 예뻤지 뒤처지진 않다고 생각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척하며 입술을 뗐다. 물론 마음속으론 이 녀석 말을 따라야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표정에 드러나면 청년회장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그려. 까짓거 한 번 해보자. 뭐 이걸로 큰돈을 벌겠다는 건 아니지만 마을의 발전을 위해선 청년회장이 나서야지 않겠냐?”
그리고 그해 곧바로 우리 동네에 동네 이름을 딴 수영장이 개장했다. 동네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나와 친구 녀석의 가게인 ‘은파장’ 역시 매일 호황을 이뤘다. 그런데 호황일수록 친구 녀석의 불만도 커졌다.
“솔직히 수영복이랑 튜브 하루 빌려주는 데 20원이면 너무 저렴하지 않냐? 버스비가 3원인데?”
이 녀석 말에도 수긍은 간다. 워낙 저렴한 가격으로 수영복을 대여해주니 장사는 잘 되지만 인파가 너무 몰려 힘이 부쳤던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넌 돈보고 하는 겨? 다 마을을 위해서 하는 거지. 그럴 거면 넌 그냥 집에 가라.”
“아니 누가 돈보고 한댜? 그냥 요즘 너무 힘드니까 그렇게 얘기한 겨….”
힘들지 않은 날은 없었지만 매일이 즐거웠다. 장사가 잘 돼서보다 우리 마을에 대한 애착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매해 여름이 오면 여름휴가를 반납한 채 은파장을 열고 수영복을 대여해줬다. 튜브를 찾는 사람도 많아 튜브까지 직접 구해 빌려줬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수영복을 빨아 널고 동네 친구들과 막걸리를 먹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항상 그렇게 행복할 줄 알았다.
 

와정골에서 바라다 본 모습 (1980년 7월)

 

◆ 갑자기 찾아온 청천벽력
정부가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등 주요 강에 유역조사를 펼쳤는데 이들 수역의 수자원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금강에도 댐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우리 마을에도 영향이 있겠어? 대전 최고의 수영장이 있는 곳인데…’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아니었나보다. 댐이 들어서면 엄청나게 큰 호수가 생기는데 결국 우리 마을이 수장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들었어? 우리 동네에 큰 댐이 생긴댜, 난 댐은 실제로 본적도 없는데 잘됐다.”
“댐 들어서면 은파장 문 닫아야 혀. 수영장도 없어지는 거라고. 그리고 정해진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이야기 좀 하지 말어.”
그럴 리가 없겠지만 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으나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의 높으신 분이 마을을 방문했다.
“평당 대전은 2000원인데 이곳은 2500원으로 책정했습니다. 각하께서 전국의 수몰 예정 지역민을 배려하신 결과입니다. 잘 살기 위한 일이니 모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동네 주민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나랏님이 하신다니 그저 따라야지란 군중심리가 작용했다. 그 때부터였다. 훈훈했던 동네 민심이 바뀌기 시작한 게. 수영장을 찾던 인파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은파장의 매출 역시 반토막 났다. 인파가 줄어드니 슬슬 마을 어르신들은 이주를 준비하시기 시작했다. 청년회장이란 직책 때문에 우리 가족은 최대한 이주를 늦췄다. 댐을 짓기 위해 포클레인 같은 장비가 마을에 들어왔고 1975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매일 소음에 부모님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지만 우리가 걱정할까 내색은 안 하셨다. 이주 외엔 방법이 없지만 대를 이어 살아온 고향을 뒤로하기엔 우리네 슬픔은 너무 컸다. 그래서 난 오히려 슬픔이란 명목에 부모님께 많은 짜증을 부렸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언제까지 여기 살 거여? 엄마아빠도 슬슬 짐 싸요. 얼렁.”
그렇게 생애 첫 이사를 준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 동구 판암동에 거처를 마련했다. 대청댐 공사가 한창이었던 1978년 가족은 달구지에 모든 짐을 실은 뒤 우리의 고향을 떠났다.
 

1980년 7월 토몰고개에서 바라다 본 등마루산과 마을 터.

 

◆ 내 고향은요…
그렇게 고향을 떠났지만 그 이후에도 헛헛한 마음에 마을을 몇 번 찾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올까 했지만 덩그러니 남은 집터를 보시면 눈물바다가 될까 혼자서만 왔다갔다. 댐이 완공된 1981년 6월 마을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친구 녀석으로부터 들었다.
“야야. 진짜 우리 마을 없어진댄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우리 집은 보고가야 안컸냐?”
대꾸도 없이 사진기만을 들고 친구 녀석과 같이 바로 내 고향으로 향했다. 다행히 물이 많이 차오르진 않았다. 어디서 소식들을 들었는지 윗집 할아버지, 아랫집 동네 형 등 적지 않은 주민이 모여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고자 모였다. 그들 모두 서로 안부는 묻지 않고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기 때문이다. 한 할아버지는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대대손손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란 동네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아이고. 저기 우리 집인디…. 우리 집인디…” 하며 느릿느릿 물속으로 향했다.
“어…. 어…. 할아버지 안돼요.”
우리가 말릴 새 없이 할아버지는 물에 빠졌고 그 순간 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물밀 듯이란 말이 실감났다. 그리곤 할아버진 뭍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마을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던 곳은 이제 물소리와 울음소리, 그리고 고향을 잃은 사람들만이 남았다.
다들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해가 서쪽으로 지고 달이 뜨기 시작하자 하나둘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물 밑에, 그리고 가슴에 품었다.
그 때부터였다. 낚시를 취미로 삼은 게. 낚시하러 간다는 이유로 친구 녀석과 내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럿 강태공을 만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정도 인사를 하고 “고기 좀 잡히냐”는 일상적인 질문 뒤에 바로 들어오는 물음이 있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러면 내 대답은 40년 가까이 한결같다.
“충남 대덕군 동면 내탑 42번지에서 왔어요.”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영상=정재인 기자 jji@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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