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雪岳山) 가는 길에 개골산(皆骨山) 중을 만나
중더러 물은 말이 풍악(楓嶽)이 어떻더니.
이 사이 연(連)하여 서리 치니 때 맞은가 하노라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

 

개골산은 겨울 금강산의 이름이다. 금강산은 철마다 이름이 따로 있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다.

금강산의 가을 절경을 문답식으로 표현한 시조로 구체적인 설악산 노정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설악산 찾아가는 길에 마침 금강산에서 오는 중을 만났다. 중에게 “가을 금강산의 경치가 어떠하뇨” 하고 물었더니 “요즈음 계속해서 서리가 내리니 때가 알맞은가 하오”라고 대답했다. 설악산을 가는 길인데 중을 보니 그 너머 금강산 경치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 시조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볼 뿐 세계에 나의 어떤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고 묻고 대답하는 문장으로만 제시되어 있다. 그만으로도 독자들은 세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다.

성진(城津)에 밤이 깊고 대해(大海)에 물결칠 제
객점고등(客店孤燈)에 고향(故鄕)이 천리(千里)로다
이제는 마천령(摩天嶺) 넘었으니 생각한들 어이리

성진은 함경북도에 있는 지명 이름이고 마천령은 함경남도 단천과 함경북도 성진 사이 도계에 있는 재다. 성진에 밤이 깊어지고 바다 물결이 들이칠 제 객창의 쓸쓸한 등불을 바라보자니 고향은 천리 밖에 있다. 마천령을 넘었어도 아직도 갈 길은 멀고 고향이 가까워올 수록 마음은 더욱 급하다.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1735년 지평 이태중이 왕의 미움을 사 유배당한 사건이 있었다. 조명리는 일찍이 그를 한림직에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 때문에 함께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 후 교리로 복직되기는 했으나 소론 이광좌의 당으로 지목이 되어 2년간 성진에서 유배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 시조는 유배에서 풀려나 귀경할 때 쯤 자신의 심회를 풀어낸 것으로 짐작된다.

해 다 져 저문 날에 지저귀는 참새들아
조그마한 몸이 반 가지도 족하거늘
어떻다 크나큰 덤불을 새워 무엇 하리오

참새들을 통해서 이권에 골몰하는 소인배들을 경계한 당시의 정치 풍토를 풍자한 시조다. ‘해 다 저문 날에 지저귀는 참새들아, 몸이 작아 반쪽 가지만도 족한데 무엇하러 큰 덤불 같은 이권이나 세력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느냐.’ 참새들은 왜소한 몸짓에 맞는 작은 가지에 앉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자신의 역량을 모르고 큰 것만을 바라는 있으니 그 세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나 이권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자신의 분수를 지키라는 경계를 삼아도 좋을,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는 시조이다.

김수장은 조명리 작품을 ‘사의선명(辭意鮮明) 안개활연(眼開闊然), 그의 시조가 뜻이 선명하고 마치 눈앞이 활짝 열리는 듯하다’라고 평했다. 그는 이렇게 선명한 이미지로 상상을 자극,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수준 높은 작품을 썼다. 글씨에도 뛰어났던 그의 문집으로는 ‘도천집’이 있고, 시조 4수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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