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이제 우리 집 ‘별이’도 철이 드나 보다. 얼마 전 딸네 가족들의 오키나와 휴가에 함께하느라 일주일이나 집을 비웠는데도 사료 그릇을 깨끗이 비웠으니 말이다. 처남이 막 젖을 뗀 강아지를 보내왔을 때 불쌍하다며 사료에 고기를 얹어준 게 버릇이 돼서, 사료만 주면 며칠씩 굶으며 버텼기 때문이다. ‘별이’는 15살 된 우리 강아지 이름이다. 딸애가 교회에서 자신을 잘 붙여주지 않는 어린애의 애칭인 ‘별이’를 강아지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강아지만은 자기를 잘 따르길 바라서였으리라.

중국 황실에서 살던 페키니즈 종인 ‘별이’는 독립적인 기질이 강해 안아주는 것도 싫어하고, 하루 한 끼 햄을 섞은 사료를 먹고 코를 골며 자는 게 일과다. 오랜 육종으로 커다란 눈과 구멍만 뻥 뚫린 코가 외계인 같지만, 광고 영상에도 등장할 정도로 귀여운 면도 있다. 아내는 억지로 끌어안다 가끔 물리기도 하지만, 살갑지 않아 손을 타지 않는 게 무심한 내 성격엔 딱 맞다. 더구나 내 앞에선 배를 드러내고 순종해 무던한 가족으로 지낸 게 어느새 15년이 되었다.

그새 애들이 다 출가하고 손자가 넷이 되면서, ‘별이’는 명절이면 늙고 둔한 몸으로 김치냉장고 위에 얹혀 떠들썩한 소리에 잠을 설치는 신세가 됐다. 어린 손자들이 마구 주물러대는 호기심도 참아야 하고, ‘너 언제 죽을래?’ 하는 도발적인 질문도 들어야 하니, 무릇 생명이란 늙으면 서러운가 보다. 이름도 ‘별이’고, 하늘의 별이 폭발하면서 나온 원소들이 만물이 된 것이니, 결국 우리 모두가 그 근원은 하나이고 다 별처럼 빛나는 존재인데 말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애견인구가 천만에 이르면서 개는 반려동물로 그 격이 높아졌고, 동물의 삶의 질을 따지는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동물보호단체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는 인간의 생명과 다른 생명들 사이에 근원적인 차이가 없다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동물애호가 아주 선별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의존적인 개나 고양이에 대한 애착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의 생명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감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슬견설’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다. 장작불 앞에서 옷을 벗고 이를 잡아 불에 던지는 사람과, 개를 마구 두들겨 패서 잡는 사람들의 잔인함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무릇 생명이란 그 크기에 따라 소중함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애완동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다른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산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한다. 내 의지대로 따르며 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개는 사랑스럽지만, 조금이라도 내 뜻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태도를 보이면 그 사랑은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유대인에 대한 잔인한 학살로 악명 높은 히틀러가, 꽃이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을 괴로워했고, 또 굉장한 동물애호가로 채식을 고집하며 강력한 동물애호법을 제정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한남대학교를 상징하는 ‘한남이’는 문헌기록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종개로, 온순하고 복종심이 강하며 경주 지역에만 있는 천연기념물을 기증받은 것이다. 하얀 몸매에 귀가 쫑긋한 ‘한남이’에 대한 대학 측의 사랑은 아주 각별해서, 총장의 교내 순시에도 동행하고 심지어는 인사말을 하는 단상에도 동반한다고 한다.

그런데 총장실이 있는 본관 옆 ‘한남이’ 거처 앞엔 해를 넘겨 8개월 넘게 농성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천막이 있다. 용역업체의 정년 단축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판정받아 그 대표가 검찰에 송치되고, 대학 측의 농성자들에 대한 업무방해 및 명예권 침해금지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의해 모두 기각됐음에도, 대학은 노동자들의 울부짖음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사람인데,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비통한 외침을! 마태복음 25장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경고한다. 우리 이웃의 탄식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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