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갈 길이 막혔다고 낙망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다. 막힌 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길이 막혔다고 느낄 뿐이다. 길이 막혔다고 인식되거나 느껴질 때, 가만히 눈을 감고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던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가만히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라. 아, 거기에 훤하게 열린 길이 펼쳐지고 있지 않던가?

갈 길이 평탄하고 넓게 펼쳐져 있다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가? 착각하지 말라. 그 길 막다른 골목으로 꺾어지거나 천인단애의 벼랑 끝에서 갈 길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경험하지 않던가? 거기 맞닥뜨리기 전에, 좋게 펼쳐진 길 위에 무서운 구릉과 절벽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않던가? 그렇게 되기 전 아주 지극히 밝고 맑은 눈과 정신으로 참 길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면서 나갈 일이다.

더럽기 짝이 없던 이번 선거판이 끝났다. ‘선거판 개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말은 개에 대한 모독이다. 개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더러운 판을 혹시 ‘사람판’이라고 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선거판에 끼어들면 오로지 올라야 하는 꼭짓점 하나 뿐인 듯하다. 그것을 향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달린다. 그러다 보니 자신 말고 상대편은 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자요, 거짓말쟁이요, 성폭력배요, 사기꾼이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라를 망쳐먹을 아주 몹쓸 존재들이요 시대를 따르지 못하는 낡고 쓸모없는 존재들뿐이다. 모두가 다 제 잘났다고 주장하지만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저질스런 말과 행동과 기획들이 쏟아진다. 그것을 보노라면, ‘어이구 저것들에게 내 귀한 한 표를 주어 나라 일을 맡겨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도 참으로 많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나선 사람들 중에서 누구인가 하나를 골라서 표를 주어야 하는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제일 나쁜 놈, 아닌 놈부터 하나씩 제하고, 그 중 가장 덜 나쁜 놈을 고를 수밖에 없다고 하며 표를 준다. 이것은 개개인이 판단력을 동원하여 할 경우의 선거다. 그러나 그러기 이전에 일단 방향을 정하면 한 흐름을 따르는 자에게 표를 몰아준다.

입후보한 사람들보다 소위 정당을 따라서 표를 준다. 이 때 당락은 입후보자의 잘나고 못남이 아니라, 어느 정당의 줄을 잡았는가 하는 데 따라 갈린다. 이러할 때도 바른 민심이라는 것이 있으며 시대정신의 반영이란 선거가 가능할까?
놀랍다. 그렇게 엉망진창 속에서도 선택의 총합은 아주 뚜렷하게 빛나고 그윽한 향기가 난다. 당사자들이야 실망하고 기뻐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도도하게 민심의 이름으로 시대정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선거판에서 막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짓은 그 당사자의 그런 수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큰 것은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곧 시민들을 무시하는 일이다. 그렇게 무시당하는 시민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것은 표로 나타난다. 이번 선거는 바람직한 균형을 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결과는 무서운 경고요 심판이다.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이제까지 지내온 것들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다음 행위에 대한 경고다. 한 판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번에 이긴 자는 다음에 질 것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하고, 이번에 진 자는 언젠가 다시 일어날 것을 희망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이다. 언제나 바닷물이 밀물과 썰물로 지루한 듯한 역사를 반복하듯이, 무수히 많은 길들이 합했다 갈라지고 다시 합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듯이 선거로 이루어지는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길은 끝없이 펼쳐지고, 물결은 끊임없이 출렁인다. 그 길 위에 내가 서고, 그 물결을 타고 나는 항해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로 나타난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반공 진보 보수 좌익 우익이니 하는 따위의 낡은 틀을 벗어버리고 모두가 다 하나로 어울려 거룩하고 아름답게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면서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자들은 누구를 물을 것 없이 매정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실례다. 그러면서 정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기쁨과 행복을 주는 즐거운 경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떠나서 혐오감을 주는 정치행위는 이제는 발을 디딜 땅이 없다는 실증이다. 여야라는 낡은 틀에 매어 찬성과 반대를 집단 이기주의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참다운 정치를 하는 데 잠시 공헌하라는 명령이다. 그러기 위하여 지나치게 인위스런 정당조직이나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람살이의 참모습을 찾아서 독자노선을 밟으라는 명령이다. 못된 대표를 병아리 어미닭 쫓듯이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참살이를 찾아서 바른 길을 가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이번 선거에 참패한 세력들은 단단한 각오로 그 위기를 극복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크게 승리한 정당은 그들이 잘해서라기보다는 시대정신을 읽어보라는 뜻이므로, 교만하지 않고 일대 변혁하는 자세가 아니고는 다음 총선에서 무섭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제대로 된 정치교육과 훈련을 아주 열심히 해야 한다. 모든 골짜기의 물들은 흐르고 흘러 거대한 강을 거쳐 끝없는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된다. 모든 길도 내 앞에만 전개되는 듯이 보이지만, 온 우주를 다 연결하는 그물처럼 얽혀서 하나를 이룬다. 좁고 작게 보지 말고, 넓고 크고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한 두 번의 성공과 실패는 지나치게 실망할 일도 아니고, 하늘 끝 모르듯이 기뻐할 일도 아니다. 길은 언제나 열려 있고, 썰물과 밀물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제 할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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