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주형직 을지대 교목

러시아 월드컵이 시작됐다. 지구촌은 공 하나의 움직임에 따라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함성과 탄식을 토해낸다. 너와 나를 같은 편으로 묶고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을 경험하지만 비통한 좌절과 낙심도 받아들일 수 있다. 공은 둥글고 조건은 동일하다. 공정한 기회가 제공되지만 여간해선 이변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결과는 알 수 없기에 승리에 벅찬 감격이 있고 패배에도 진한 감동이 있다.

골문에 공만 넣으면 되는 이 단순한 경기에 세계가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는 경기에 몰입하는 순간 공과 일체가 돼 자유를 만끽하는 결정의 순간을 맛보기 때문이라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원초적인 쾌감과 영혼의 순수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인간의 잠재된 전쟁본능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 월드컵기간 중에는 얼마든지 국가주의를 드러내도 비난받지 않으며 집단성을 생산해 적대감을 조성해도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쟁을 통해 생존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생존경쟁의 매커니즘은 인간의 유전자 속에 깊이 내장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게 한다.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은 그 의미가 주는 부담감에 애써 회피하려 하지만 경쟁은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촉매제다. 지금에 머물지 않고 성장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이 승부와 결과로만 이야기 될 때 개인과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며 갈등과 파멸로 몰아간다. 승리를 위한 반칙과 속임수가 속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면서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이 실종되기 때문이다. 성장은 쉽게 한계의 바닥을 드러내고 발전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돌아서는 상대의 뒷덜미를 공격하고 빌미가 된다면 그게 무엇이든 붙잡고 끌어내리는 편이 한층 쉽다. 어차피 승자만 기억할테니 말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는 놀라운 결과였지만 경쟁의 불편한 뒷면을 목격하는 사례가 됐다. 정책과 변화를 기대했지만 온통 협잡과 비난으로 점철된 힘겨루기만 보여줬다. 전국이 파란색으로 물드는 결과를 낳았지만 승리를 축하할 마음도 패배를 위로해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저급한 경쟁에 갈등과 피로만 쌓여서다.

이건 누구의 승리라기보다 한 시대의 종말이다. 강제로라도 무대에서 끄집어 내리기 위한 선택이었고 대안이 없기에 놔둘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다. 그동안 산업화와 반공이라는 보호색으로 손쉬운 경쟁을 일삼던 이들의 뼈아픈 패배는 구세대의 퇴장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예고한다. 경쟁상대가 바뀌면 다른 한쪽도 바뀌기를 기대하며 몰아준 선택이다.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역사가 저물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시대 경쟁은 어때야할까? 경쟁이 페어플레이가 되려면 공정한 경쟁이 돼야 한다. 공정한 경쟁이란 공정한 기회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도성장을 지나 IMF 이후 무한경쟁은 사회발전과 개인성장의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무한경쟁은 줄타기와 배경이 승부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땀과 노력만으로 결과를 보장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우리사회 소득격차는 심화되고 절망감과 무력감이 팽배해졌으며 갈등과 분노, 억울함이 시대를 대변하는 정서로 자리잡았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기 어렵고 살짝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다. 이제 ‘경쟁’은 우리사회의 부정적인 언어가 돼버렸다. 승리를 쉽게 인정해주지도 않고 패배를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다. 불만과 상처가 일상이 된 사회에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하다.

식상한 접근인 것 같지만 경쟁은 승부와 결과로만 이야기되진 않는다. 경쟁에 임하는 자세와 과정으로도 발전의 기회는 주어지고 성장은 보장된다. 월드컵 경기결과에 관계없이 환희와 감동을 경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번 월드컵은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모두의 축제가 되길 바란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