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우 공주대 교수

 

며느리 생일에 식구끼리 밥이라도 같이 먹기로 하고 서울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생일 선물로 무엇을 주는 것이 좋을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편하게 현금을 조금 주기로 했다. 아내가 봉투를 준비하면서 누가 주는 것인지 써야 할 텐데, 뭐라고 쓰는 것이 좋은지 묻는다. 생각해 보니 막상 익숙한 호칭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가족이나 친척간에 그 관계에 해당하는 호칭이 다 갖추어져 있지 않고 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촌수와 호칭을 소개하는 자료들이 많다. 대개의 경우 촌수를 따지는 것이 분명한 것과 달리 호칭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친가의 호칭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누님), 아우(누이) 등 익숙하게 ‘부르는 호칭’이 있는 반면에 처가의 경우에는 장조부, 장조모, 장인, 장모 등 ‘쓰는 호칭’만 있고 ‘부르는 호칭’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기 집에서 할아버지를 글로 언급할 때는 조부라 하고, 입으로 부를 때는 할아버지라고 하지만 조부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처가에서는 장인, 장모를 부르는 호칭이 따로 없기 때문에 쓰는 호칭인 장인, 장모가 부르는 호칭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인, 장모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하면 불학무식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가에서는 직접적인 호칭을 생략하고 대화하거나 아니면 대화의 기회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장인께서 어떻다’고 한 적은 있어도 처가에서 장인어른을 대면한 자리에서 ‘장인’이라고 직접 호칭한 적은 없다.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호칭의 실태는 친가와 처가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회상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항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처가와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속언이 이런 사회상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전벽해와 같은 사회적 변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멀수록 좋다는 뒷간이 침실 옆으로 들어왔고, 신혼부부가 사는 집에 시어머니보다 친정어머니가 더 자주 드나드는 세상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장인, 장모도 똑같은 부모인 만큼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호칭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남자인 사위가 장인, 장모를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장에 다른 묘안이 없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시 장면은 서울로 내려가는 열차 안이다.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적절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호칭이 뭐 별 것이겠는가! 익숙한 호칭을 쓰면 되는 것이다. 며느리가 어머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어머니 또는 시어머니가 주는 것으로 쓰면 되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 생각에 어머니는 사실과 다르고, 시어머니는 자칭하기에 권위주의적인 느낌이 들어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미’가 주는 것으로 쓸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미라는 말의 어감이 좋지 않다고 탐탁해 하지 않는다.

에미라는 말의 어감에서 비롯된 아내의 부정적인 감정을 십분 이해하지만, 언제나처럼 내 방식대로 에미라는 말의 의미를 해석해 주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 자신을 ‘애비’ 또는 ‘에미’로 낮추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같은 윗사람이나 타인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낮춤말을 아랫사람인 자식에게도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겸손한 자세는 물론이고, 아랫사람인 자녀의 인격도 존중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교양수준이 세련되지 않으면 쉽게 사용하기 어려운 고급어법인 셈이다.

아무튼, 서울에 도착해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생일축하도 하고 단란한 분위기로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며느리에게 봉투를 전할 때 확인하지는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아마 아무 말도 쓰지 않고 맨 봉투로 전했을 것이다. 마치 내가 처가에서 직접적인 호칭을 생략하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소한 호칭 하나도 이렇게 쉽지가 않으니 가정이나 사회에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이 어디 녹녹하겠는가. 내 정신의 곳간에 든 정성과 조심의 수량과 품질을 다시금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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