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어느 쯤엔가. 봄 나비의 날갯짓과 여름 매미의 울음소리 사이 어딘가쯤. 그렇게 일교차는 점차 커지며 짧고 짧은 올해의 봄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봄이 오면 겨울이 가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게 자연의 이치지만 ‘든 자리는 몰라도 떠난 자리는 안다’는 사람의 욕심처럼 떠나려는 봄의 끝자락이 더욱 아쉬워진다. 떠난 과거는 어떻게든 미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재의 대청호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보다 미래에 추억하는 당시의 대청호가 더 아름답게 느낄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아름다운 대청호보다 더욱 눈부실 대청호의 모습을 상상하며 봄과 여름 사이에 ‘같이 가요. 대청호오백리길’은 발걸음을 뗀다.
 

대청호 영상

 

 

◆ 산길부터 시골길까지… 모든 분위기 담아낸 초반부

대청호오백리길 6구간부턴 대부분 충북에 위치했다. 출발점인 방아실 입구는 주소지가 대전이지만 곧바로 충북으로 넘어간다. 방아실 입구에서 약 20m만 가면 담벼락이 하얀 주택이 나온다. 주택을 왼쪽에 끼고 돌아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6구간의 시작점이다.

초반엔 산길로 능선을 따라 쭉 걷기 때문에 부담이 될 거라 생각되지만 6구간 초입부터 높진 않지만 제법 울창하게 길 양 옆에 자란 소나무가 덕분에 상쾌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길 따라선 소나무의 솔잎이 내려앉아 조촐한 오솔길이 형성됐다. 솔잎이 발끝에 푹신함을 전달해주기 때문에 무리 없는 산행이 가능하다.

대청호가 곧바로 보이지 않아 살짝 심심할 수 있지만 지루할 때마다 능선의 오름과 내림이 불친절하게 나타나 나그네가 따분하지 않게 한다. 직선으론 약 2㎞의 거리지만 능선을 따라 언덕이 이어지기 때문에 체력이 금방 바닥날 수 있다. 높아진 기온에 평소보다 빨리 체력이 떨어질 때쯤 대청호가 소나무 틈에 얼굴을 내비친다.

아직 온전한 대청호의 모습을 보긴 힘들지만 ‘얼마나 멋진 모습을 숨겨놨을까’ 하는 기대감이 나온다. 기대감이 제법 나올 때가 되면 마지막 내리막이 나타나 토방터가 나온다. 토방터는 대전 동구 주촌동의 옛이름이다. 토방터란 뜻은 정확히 전승되는 얘기가 없다. 그러나 과거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많이 살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제법 머슴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토방이란 바닥이 흙으로 마무리된 방으로 지역에 따라 개념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머슴방을 일컫는다. 토방, 즉 머슴방은 시골집일수록 토벽인 채로 매흙질한 외에 다른 치장이 없는 게 특징이다. 경주이씨는 국내 이 씨의 대종(大宗)이라 할 정도로 제법 힘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이에 따라 머슴이 많았을 가능성이 있어 현재의 주촌동 옛 이름이 토방터로 불렸을 수 있다.

주촌동으로 들어서면 이름이래봐야 백돌이, 백순이일 것으로 추정되는 개들의 우렁찬 짖음이 연속적으로 반긴다. 한 마리의 짖음이 곧바로 다른 한 마리의 짖음으로, 또 다른 한 마리가 응답하는 메아리의 연속이 대청호에 갇혀 되돌아온다. 잘 꾸며진 시골길이 특징으로 길을 따라 걷다보면 드디어 대청호의 온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아직 익지 않은 청포도의 신 냄새까지 코끝을 간질인다.

코끝의 감각에 취해, 그리고 대청호가 선사하는 고막의 느낌에 빠졌을 때 백돌이와 백순이의 대장으로 보이는 거대한 백구가 주촌동을 지키려는 듯 한량들의 신원을 확인하러 등장한다. 한량을 환영하는 것처럼 묵직한 울음소리 한 번을 내고 제 갈 길을 떠난다. 6구간의 주촌동은 대청호를 왼쪽에 끼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된다. 주촌동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네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나올 듯 구수하다. 구수함에 이끌려 어느새 작은 언덕을 넘게 된다. 그렇게 나그네는 대전에서 충북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부동, 그리고 의형제 이야기
충북 보은군 회남면에 들어서면 곧바로 대청호반이 시작된다. 6구간에서 가장 가깝게 대청호를 볼 수 있는 구간이다. 푸른 대청호도 제법 장관이지만 6구간에서 아무래도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대청호반과 복숭아나무를 지나 등장하는 연꽃마을이다. 오백리길을 찾는 이들을 위해 조성된 작은 공원으로 분홍과 노랑의 연꽃이 각자의 못에 위치해 경관을 선사한다.

그리고 곧바로 어부동이 나온다. 어부동의 유래는 어부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세상을 소요하며 살겠다는 묵객들이 자주 찾았고 선비들이 초야에 묻히기 위해 이곳에 많이 들어왔다고 하며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제법 재밌다. 이야기는 이렇다. 과거 김 씨 성을 가진 진사(進士) 부부가 살고 있었다. 김 진사는 높은 벼슬살이를 장기간 해서인지 벼슬살이에 싫증을 느끼고 현재의 어부동에 정착해 낚시질을 취미로 살았다. 비가 개인 뒤 어느 날 김 진사는 평상시대로 집안을 돌본 다음 강변 절벽에 올라 낚시를 했다.

갑자기 낚싯대가 흔들려 급히 낚싯대를 잡아 올렸지만 낚싯대가 올라오지 않았다. 제법 묵직한 녀석이 미끼를 문 것이다. 김 진사가 강물을 바라보니 큰 개만한 잉어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김 진사는 땀을 흘리며 한참 동안 잉어와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급류에 휘말리고 말았다.

급류에 떠내려가면서도 김 진사는 “잉어놈 아깝다”란 생각을 했다고. 그러다 결국 기진맥진해 익사하기 직전까지 위험에 처했다 동료인 이 진사에게 구출됐다. 이 진사는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로 매우 가난했다. 이 진사에 의해 목숨을 구한 김 진사는 눈물을 흘리며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대가 생명의 은인이 아니겠나. 자네에게 내 재산을 반만 주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이 진사는 “친구지간에 무슨 보답인가”라며 그를 나무랐다. 그래도 김 진사는 “난 그냥 집에 돌아갈 수가 없네”라며 완강하게 나섰지만 결국 더 고집스러운 이 진사를 이기지 못한 채 한 가지 약속을 하고 어부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약속이란 게 이 진사가 나중에 어떠한 부탁을 하더라도 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사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병에 걸렸지만 돈 한 푼 없어 결국 약도 먹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그는 눈을 감을 때 아들녀석에게 “내가 빚진 것 때문에 너도 참 힘들 것이다. 내 장례도 간단히 해치우고 내 상자 맨 아래쪽을 보면 편지가 한통 있을 것이다. 그걸 어부동에 사는 김 진사에게 갖다 주거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 진사의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했지만 돈이 없었기에 장례를 미루고 있었다.

이 진사의 아들은 한참 생각하다 아버지가 말한 편지를 꺼내들고 곧바로 김 진사를 찾아갔다. 김 진사는 그를 보자 반가와 하더니 이 진사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덥석 주저앉으며 “나 같은 사람은 일찍 죽고 이 진사 같은 사람이 장수해야 하거늘 세상이 무심하구나”라고 통곡을 했다. 그리곤 이 진사의 아들에게 큰 금덩이를 주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이 진사의 아들은 놀랐지만 죽은 아비를 생각하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고 마을의 입구에 있는 강이 불어 건너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 때 강을 무리하게 건너던 사람이 결국 급류에 휘말렸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발만 동동거릴 뿐, 그 누구도 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이 진사의 아들은 김 진사로부터 받은 금을 번쩍 들더니 “저 사람을 살려주면 이 금덩이를 주겠습니다”라고 외쳤다. 그 순간 한 젊은이가 물 속으로 뛰어 들었고 사람을 들쳐업은 채 뭍으로 나왔다. 약속이 약속인지라 이 진사의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금덩이를 그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금덩이를 받고선 “이렇게 큰돈이 생겼는데 그냥 있을 수 없소. 형씨네 집에나 한번 가봅시다”하고 말했고 이 진사의 아들은 그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금덩이를 선뜻 건넨 양반의 집에 가면 대접 좀 받겠거니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걸. 집은 다 무너져가고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이를 딱히 여긴 남자는 이 진사의 아들과 함께 이 진사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곤 “아니, 금덩이를 줄 정도의 양반이 이렇게 가난할 줄 몰랐소”라고 했고 이 진사의 아들은 자신의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갑자기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내가 바로 어부동 김 진사의 아들이외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돌아가셨다고 해 문상을 가려고 당신의 뒤를 따라왔소”라고 말했다.

이 진사의 아들은 처음은 너무나 놀랐지만 이내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김 진사의 아들은 의형제를 제안하며 나이를 따지기 시작했고 “내가 조금 나이가 어린것 같소이다. 그래서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리고 이 진사의 편지에 따르면 자식을 돌봐달라고 했소. 아버님이 재산의 반을 주신다고 하니…”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이 진사의 아들은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김 진사의 아들은 “그럼 형님은 아버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효자가 되겠습니까?”하고 물었고 결국 재산을 넘겨받았다. 둘은 남은 재산으로 여생을 잘 살았고 그들의 이야기는 훗날 어부동에 어진 이가 찾아오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의형제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걸으면 어느새 회남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6구간의 마지막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러나 이곳에서 곧바로 회남대교로 향하지 않고 산수리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의 묘미는 높은 지대에서 펼쳐지는 형형색색 지붕의 마을과 이와 대척되는 푸른 대청호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의 굽음, 대청호, 마을의 지붕색이 제법 어우러져 나름의 장관을 선물한다. 경치를 감상하며 지친 다리에 충분히 휴식을 주곤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다. 회남대교를 지나 남대문교의 작은 공원에 이르면 길고 긴 6구간이 종료된다.

글 사진=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영상=정재인 기자 jji@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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