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오래 전 아내에게 들은 우스갯말에 ‘내 아들 시리즈’가 있다. 정부 고위직에 올라 보기도 힘든 아들은 나라님 아들, 의사나 판검사가 된 아들은 장모님 아들, 그냥 평범한 소시민은 내 아들, 장애가 있는 아들은 영원한 내 아들이란다. 일그러진 세태를 풍자한 것이지만, 자식을 세속적 성공의 잣대로만 구분 짓는 게 편치 않다. 하지만 영원한 내 아들 얘기는 애절한 부모의 심정에 가슴이 저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환경오염 악화나 각종 재해 등으로 이제 누구도 장애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그런 만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많이 개선돼 장애인의 반대말이 비장애인인 게 상식이 됐다.

무릇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다 지극하지만,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깊고도 넓다. 물론 아버지도 자식에게 살갑고 헌신적이지만, 어머니의 사랑만큼 온몸으로 사랑을 느끼고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사모곡’도 아버지의 사랑은 호미로, 어머니의 사랑은 낫으로 비유해 그 차이를 대비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찬양했나 보다.
물론 이런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 선친께 들은 얘기다. 뜻밖의 사고로 아들을 잃게 된 부모의 이야기다. 어머니는 실성한 듯 머리를 풀어헤치고 땅을 구르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데, 아버지는 조문객을 맞으며 간간이 술도 한 잔씩 마신다. 어미는 눈에 불을 켜고 ‘저런 인정머리 없는 애비 놈 좀 보소!’ 하며 큰소리로 욕을 퍼붓는다. 말없이 지켜보던 아비가 술잔에 가래를 뱉어 보여주더란다. 술잔엔 피가 섞인 가래가 떠 있더란다. 아들 잃은 아비의 슬픔이 어미 못지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지극한 부성애를 다룬 소설 ‘가시고기’가 한때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적이 있었다.

고교 동창으로 한때 유명 극작가로 활동하던 박구홍은 이제 자폐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가시고기 아빠로 살아간다. 몇 년 전 고교 친구들 카톡모임에서 만나게 된 구홍이와 둘째 아들 길호는 이제 우리 동창 모두의 친구가 됐다. 학창시절 늘 자신만만한 모습에 걸쭉한 입담으로 친구들을 몰고 다니던 구홍이는 대학에서 개최한 문예백일장에서 당선된 시를 칠판에 휘갈기며 으스대던 문예부장이었다. 그때는 다들 세재나 영석이가 당선될 거로 예상했다가 구홍이가 당선돼 놀랐지만, 나는 칠판에 쓴 그 시를 보고 구홍이가 시인이 될 것을 예감했다. 당시는 누구나 김소월이나 신석정의 시 몇 편은 외우던 시절이어서, 구홍이가 후렴구를 반복하며 운율과 구성을 갖춘 게 나름 시 쓰는 법을 터득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명한 텔레비전 방송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주목을 받은 구홍이가, 내가 속한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임을 알았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오랜 동안 아픈 둘째 아들을 고쳐보겠다고 캐나다도 갔다가 돌아온 뒤 백방으로 애쓰다가 아들이 좋아하는 미술치료를 받으러 수원에 둥지를 틀고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세고 한쪽 다리를 조금 절면서 아들과 커플티를 입고 24시간을 함께하는 ‘가시고기 아빠’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구홍이의 톡톡 튀던 총기와 좌중을 압도하던 장광설도 이젠 무뎌져 어눌해졌고, 매섭던 눈매도 부드러워졌다.

길호의 그림은 일반적인 화법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고유한 인식을 자유스럽게 펼쳐낸다. 작년에는 그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했는데,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그림을 보듯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자는 제안도 받았다니,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이 소중한 결실을 맺은 셈이다. 이제 길호는 친해진 아빠 친구들과 바닷가도 가고, 또 절에도 가고, 아빠 친구들이 사는 남원, 대전, 부산 그리고 제주도까지 놀러가곤 한다. 우리는 매일 카톡방에서 길호의 일과를 사진으로 확인하며 손을 흔든다. 구홍이는 길호를 위해 반찬도 만들고 여행도 다니며 길호가 그림을 그릴 때 자기도 그림을 그린다. 구홍이는 자기 그림이 영혼을 형상화한 소울 화법이라 자랑하는데, 우리 눈엔 아들 길호 그림이 더 좋다. 우리 집 현관에도 길호가 그려준 내 초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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