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주형직 을지대 교목

“어떻게 살고 싶은가? 우주를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살되, 나를 버릴 수 있는 큰마음으로 살고 싶다. 뜻은 고결하되 자유롭고, 행동은 거침이 없되 벗어남이 없으며, 말은 꾸밈이 없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우연히 오랜 메모를 발견했다. 이상만으로 현실을 충분히 감수하며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청년의 때, 어느 한 날 끄적거렸던 글이다. 아마도 누군가의 질문에 고민한 흔적인 것 같다.

오래 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기억은 그렇게 살지 못한 현실이 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세상이 제시한 삶의 방법에 익숙해진 채 세상이 규정한 행복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겨우(?) 먹고 사는 문제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왔던 세월이 부끄럽다. 수치를 알면 벗어나면 되지만 도무지 그러기 쉽지 않다. 삶을 부정하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아서다.

어릴 적엔 시간이 지나면 절로 성숙하게 되는 줄 알았다. 나이 먹고 경험 쌓이면 세상사는 일에 노하우가 생기고, 더 많이 지혜로워지고,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다. 더 많이 성숙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들수록 고집스러워지고, 비굴해지며, 점점 더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 지난다고 저절로 성숙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상담을 하다보면 들어줘야 할 때가 많다. 상대는 문제의 해법을 찾기보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공감받길 우선적으로 원한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 어렵기만 하다. 상대의 말을 귀 담아 듣기보다 섣부른 조언으로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우월한 입장에서 훈계하고 싶은 교만한 충동도 있지만 그저 일을 빨리 매듭짓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보면 말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상호간의 착각과 왜곡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관계가 어렵다. 종교인은 언제나 좋은 사람이길 원하는 대중의 기대가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능하면 호의를 베풀고 대체로 친절을 베풀기에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지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다. 원칙만 고수해도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상대 의견에 쉽게 동의해주지 않아도 알고 보니 나쁜 사람이라고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기대위반(Expectancy Violation)으로 설명되는 현상처럼 상대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반대되는 평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관계란 반복된 교제가 전제된 과정의 결과인데 이것이 허락되지 않은 경우도 적잖다. 선입견과 편견만 잔뜩 끌어안은 채 관계가 끝나는 경우도 많아서다. 그 때문에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고 상대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관계에 관해선 심리적 거리를 설정하게 된다. 너무 멀어서도, 너무 가까워서도 곤란하다 여긴다. 부담되지 않을 만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현명한 처신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자꾸만 계산하고 의도성을 갖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적절한 거리가 얼마인지를 계산하고 너무 깊은 대화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게 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일 리 없다.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는 안전한 방법일 순 있지만 바른 관계는 아니라는 얘기다.

관계를 맺는 건 어떻게 사느냐와 관련된다. 관계적 삶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유대계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사회적 관계가 존재에 선행한다는 뜻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사회적 관계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가 살아간다는 의미다. 결국 잘 산다는 건 내가 아니라 우리가 잘 사는 걸 말한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선 사회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행복해야 한다. 삶은 개인의 성공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개념이다. 그럼 어떻게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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