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곽에서 비롯된 윤락문화 한국전쟁 뒤 되살아나

[대전역 들어서며 성행…80년대 전후 전성기 맞아]

많은 이들이 오가는 대전역. 그 주변은 대전의 ‘아픈 손가락’ 같은 역사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이 어두운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와 마주한다. 쪽방·여인숙이 밀집한, 여기에 공동화까지 겹친 역전 1길, 여관과 술집이 늘어선 대전로·태전로·중앙로(이하 대전로) 일대는 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이 따라 다닌다.

성매매를 비롯해 폭력 등 범죄가 만연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나왔다. 그동안 해결책 없는 메아리로 맴돌았지만 최근 변화의 조짐도 있다. 역전1길과 대전로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변화의 현장을 기록한다. 편집자

대전역 인근 역전1길과 그 맞은편 대전로의 역사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역전 1길은 철도 건설과 함께 사람들이 모여들고 건물들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철도와 함께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엔 북관사가 형성돼 철도노동자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반면 대전로 일대의 기원은 좀 다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유곽이 그 기원이라는 점에서다. 유곽은 공창을 집창(集娼) 방식에 의해 일정구역에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며 매음행위를 하던 장소를 일컫는다. 일제가 남긴 숱한 잔재 중 하나인 유곽은 1900년대 초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역에 처음 생긴 뒤 서울과 인천 등으로 퍼져나갔고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적으로 성행했다. 대전로 일대도 마찬가지다.

욕망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광복 후 전국에서 공창폐지운동이 일고 1947년 10월 미군정청이 공포한 공창폐지령에 따라 유곽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공창에서 일하던 여성에 대한 구제책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성(性)을 사려는 수요와 욕망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사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이후 중앙로 일대와 역전1길 주변은 윤락·유흥가로 변모했다. 대전역 주변에서 관사의 필요성은 약해졌고 대신 기차역의 기능에서 파생된 다양한 수요와 요구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대한 연구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상희 목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도시재생총괄코디네이터)는 “대전역 주위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아주머니들 쉽게 발견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특히 역전1길에는 철도 주변 옹벽을 뒷벽삼아 만들어진 2층 건물이 특징이다. 당시 어려웠던 생활환경을 고스란히 대변한다”고 설명했다.

윤락과 유흥을 업으로 삼은 이 일대는 1970∼80년대 성행했다. 그러나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역전1길의 성매매와 유흥업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대전로 일대는 여전히 사람의 왕래가 잦은 반면 역전1길은 사람들의 발길조차 뜸한 지역이 돼 버렸다.

윤락조차 시들어버린 공간에 남은 건 빈집과 가난의 흔적뿐이다.

이 교수는 “이곳의 성매매가 쇠락한 건 이를 필요로 하는 발길이 줄어들고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고령화 단계로 들어선 게 한 이유로 보인다”며 “남은 이들은 여기서 어떤 경제적 이득을 얻기보다 여길 떠나선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아픈 현실과 마주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곽진성 기자 pen@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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