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원래 우리 인생사와 역사 따위는 기약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기약하고 기다리고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 인생이요 역사다. 맥없이 중단됐다가 오래 간만에 다시 시작된 남북 이상가족 만남이 두 번 이루어졌다.

심한 가뭄에 감질나게 비 몇 방울 떨어진 것과 같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또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또 다시 만나려면 건강하게 사세요’라는 헛인사를 하고 애끊는 맘으로 헤어진다. 그 헛인사 헛바람은 바로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짓’과 같다. 그렇게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한 평생을 산 사람들 중에 아무도 스스로 희망해서 헤어지고 멀리 떠나서 살고자 한 사람은 없었다. 사정이 그래서, 강제로, 어쩔 수 없어서 잠깐 이 발 저 발을 이렇게 저렇게 디디는 동안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적이 얼마나 많던가?

가난에 시달리고, 일제의 억압에 견디지 못하고, 전쟁에 쫓겨서, 독립을 위하여, 삶의 터전을 잡으려고 연해주로, 중앙아시아로, 만주로, 상해로, 하와이로, 뉴욕으로 정처 없이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곳에서 아주 심한 배척을 받기도 했겠지만, 거기서 맞아준 사람들이 있어서 어려운 상황 중에서라도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민사라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민족, 어느 종족도 조상대대로 그 자리에 그렇게 가만히 자리 잡고 울타리 치면서 사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저렇게 밀리고 쏠리고 내달아 지금 그 자리에 그렇게 뿌리를 내리고 산다. 어느 때 어떤 상황이 다가와 다시 그 자리를 떠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그 자리가 바로 영원한 그들의 자리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이요 역사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어린이에게 학교 수업시간에 제주도에 와 있는 예멘 난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있었단다. 모둠으로 나누어 찬성과 반대의 입장으로 이야기들을 준비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단다. 그에 대한 정보는 컴퓨터실에 가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얻게 되었다. 그것을 기초로 반대하는 기사와 중립 입장에 서 있는 이의 기사와 찬성하는 이의 기사를 작성해 보는 시간을 가졌단다. 예멘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입장의 기사는 넘치고 많아서 어린이들이 쓰기에 쉬웠던 모양이다.

그 대신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정보는 참으로 빈약하여 정리하고 쓰기가 쉽지가 않았단다. 어린이들 대다수도 역시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입장을 펼쳤단다. 아무도 직접 그 난민들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기사작성에는 넘치고 활기가 차고 확신하는 논조로 적성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니, 난민이라면 남녀노소가 고루 와야 하는데, 거기는 자기 나라를 위하여 싸워야 할 젊은 남자들만이 왔다는 것, 성폭력과 절도와 강도 등 범죄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 사람들이 더럽고 예의도 없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단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예멘 난민에 대한 일반정서인지 모른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나 이론으로 이러한 정서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다느니, 우리들의 조상 중에도 그렇게 난민이었던 때가 있었다느니, 우리 조상들도 다른 지역에서 쫓기거나 더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라거나 하는 말들이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꼭 같다는 논리가 먹힐 것도 아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지당한 말이 통할 것도 아닐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이니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는 도덕선생과 같은 이야기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을 한 할아버지-할머니의 자손이라는 사해동포의 의식도 먹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선 당장 ‘순수한 우리 단일 민족사회에 이물질이 들어왔다’는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한은 결코 문을 쉽게 열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당장 예멘인들을 그들 나라로 배를 태워 돌려보낼 수도 없다. 또 그 자리에서 굶고 헐벗고 살 수 있게 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받든 돌려보내든 모든 것이 결정 되어 실행하기까지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두어야 한다.

종교기관과 복지관이나 뜻이 있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활동하여 난민들을 돕고 보호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정부에서도 행정력을 발동하여 일을 하는 것을 고마워한다. 이 단계에서 할 일은 이해득실에 움직이는 여론을 따라갈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정부나 의식 있는 이들의 확고한 신념과 간절한 맘으로 끊임없이 호소하고 동참할 것을 독려할 것밖에는 없다. 아주 간절히 바라기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말과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인격이 있다면 그도 인격자라는 것을 최소한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우선 당장 어떤 열매가 맺히는 것도 아니다. 이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거리는 복잡할 것이고, 소란스러울 것이고, 질서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는 중에도 결코 인격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가장 나쁜 일이 될 것이다. 아, 저기 쫓기는 한 인간이 있다는 맘 하나 먹으면 족하지 않을까? 그것은 분명히 물 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그렇게 던진 씨, 그렇게 뿌린 먹을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날 것은 아무도 모른다.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난민 기구에 돈을 보태고, 옷을 보내고, 간절한 맘을 더하고,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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