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도 시인

어떤 도둑질

윤정옥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껏 나는 칠순 노모의 김치를 먹고 있다
음식 비법을 전수하기 싫은 이름 난 식당 주인처럼
도대체 내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해치워버린다
김장해놨으니 가져가거라
돌멩이 맞을 소리지만
왜 그랬냐고 날 부르지 그랬냐고 하면서도
한 시간 후에는 소요산쯤을 지나고 있다
차로 한 시간 반 거리
철대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가
고구마, 마늘, 김치, 만두, 가래떡을 한 아름 들고 나온다
도둑질을 당당하게 하고 나온다
아마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알토란같은 시간을 도둑질했을 것이다
단번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서너 번의 분절로
허리 펴 선 자리, 발끝마저 점점 흐릿해지는
엄마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껏 바윗덩이를 지고 무심한 산을 올랐듯
오르는 것 밖에는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갈퀴 같은 손 펴볼 틈 없이
여전히 있음을 만들고 있다
발아된 생명 키우고 있다

▶ 이 시로 보아 어머니는 무엇이든 후딱 해치우는 분입니다. 타고난 성미가 급하다기보다는 처해진 형편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농촌에 사는 여자(어머니)들은 무슨 일을 천천히 할 여유가 없지요. 들일하랴 애 키우랴 집일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그저 뚝딱. 다른 사람과 같이 하려면 갑갑증 나서 일 못합니다. 그렇다고 일을 허투루 하느냐면 그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손이 야무지고 빨라 이 일 저 일 강똥하게 아퀴짓는 게 두 번 다시 손대지 않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을 다 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딸은 그게 좀 서운합니다. 앉았다 일어나는데도 서너 번 끙끙대야 겨우 일어서는 어머니가 혼자 힘으로 일을 하는 게 영 마음이 안 놓입니다. 이번에는 김장을 다 해놨으니 가져가라고 합니다. 날 부르지 그랬냐면서도 몸은 벌써 친정으로 향합니다.

김장뿐이 아닙니다. 한 번 가면 고구마며 마늘, 만두, 가래떡 등 집안 살림을 거덜 낼 정도로 싹 쓸어 옵니다. 그러니 이건 도둑질이지요. 백주대낮에 혈연관계를 빙자한 도둑질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더 못 줘서 한입니다.

“갈퀴 같은 손 펴볼 틈 없이” 여전히 무언가를 만드는 어머니. 그렇게 연로하신 몸에 어디서 힘이 나와 그런 일을 다 할까요? 자식 사랑? 평소 습관? 죽기 전 이 몸뗑이 다 쓰고 죽어야 한다는 인생철학?
어머니. 이제부턴 너무 그러지 말고 딸자식 좀 부려먹으세요. 아 참, 그리고, 낼 모레가 추석이죠? 올 추석에는 딸내미한테 용돈 좀 많이많이 달라고 그러세요.

<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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