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김형태 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

“그대여, 살다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날이 있지 않은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찾고 싶은 날이 있지 않은가?”- 이채 ‘그대여 살다보면 이런 날이 있지 않은가’ 中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꽃보다 진한 낙엽이 발밑에 밟힌다. 왜 잎새는 저렇게 떨어지는가.

① 1905년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가 기억나는 계절이다. 미국 뉴욕의 그리니지 빌리지,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늦가을의 어느 날 폐렴에 걸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화가 지망생 존시가 심한 고통과 함께 병동 창밖의 회색 벽을 기어 올라간 담쟁이 넝쿨에 매달려 있는 잎새를 바라보면서 사경을 헤맨다.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친구의 격려에도 아랑곳없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넝쿨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고 있다.

‘저 잎이 지면 나의 삶도 끝나리라’ 생각하며 언젠가 이태리 나폴리 만을 그리겠다던 꿈도 11월의 찬 비바람에 날려갈 깊은 침잠의 시간. 같은 동네에 사는 친절한 노(老)화가, 알코올 중독자 화가 베어먼이 자기희생을 통해 나뭇잎 하나를 벽에 그려 심한 비바람에도 견뎌낸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해 그 마지막 잎새가 존시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주면서 생명을 구한다는 얘기다. 회색 벽에 걸린 마지막 잎새는 생사의 분기점, 희망과 절망, 낙관과 비관, 공포와 환희의 교차로다. 철학적으로 보면 일종의 숙명론이다.

②틱낫한 스님은 베트남전 당시 세계를 순회하며 반전 평화 운동을 벌인 수행자다. 그는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해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1973년 프랑스로 망명, 1982년 설립한 ‘플럼 빌리지’에서 명상과 수련으로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틱낫한 스님은 ‘마지막 잎새’를 어떤 관점에서 볼까. 그는 저서 ‘이해의 핵심’에서 비관 속에서 희망을 찾는 오 헨리와는 달리 현상에 대한 깊은 관조를 통해 역사적 차원으로 궁극적 차원을 발견해내며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틱낫한 스님은 어느 날 길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새를 보고 “잎새야, 너는 가을이 두려우냐”고 묻는다.

나뭇잎은 “아니에요. 봄, 여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영양분을 주어 나무를 키웠답니다. 나의 많은 부분은 이미 나무 안에 있거든요. 나의 모습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보이는 것은 작은 부분일 뿐이에요. 나는 나무 전체랍니다. 내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땅 위에 떨어져서도 나무에 들어가요. 거름이 되어 나무에 영양을 주니까요. 그래서 가지를 떠날 때 나는 나무에게 손을 흔들어요. 잠시 후 다시 보자고.”라고 말했다. 틱낫한 스님은 여기에서 잎새의 업(業)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없음’을 말해준다. 잎의 삶이 아니라 ‘잎 속의 삶’과 ‘나무 속의 삶’을 보라 권한다. 삶은 역사적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된 게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 불고 나뭇잎이 가지를 떠나 나무 속에 있음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는데 오직 인간만이 생사를 두려워하고 있다.

정원에 나가도, 길 위를 걸어도 낙엽이 쌓여 있고 혹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기꺼이 떨어져 초목귀근(草木歸根)의 원리에 따라 뿌리의 영양분이 돼 다시 내년 봄 잎으로 환생하는 일종의 윤회로 볼 것인가, 나뭇가지와 작별하면서 다시 볼 수 없는 종말론적 사라짐으로 볼 것인가, 그 연장선에서 우리가 언젠가 맞이할 죽음이 영영 ‘없음(Nothing)’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하늘나라에 새로이 탄생하는 ‘생명의 이동(Born again)’인가, 아니면 지상에서도 직계 자녀들의 삶 속에 들어 있고 우리가 한 말과 행동, 손으로 쓴 글 속에서 한동안 더 살아있는 연장된 삶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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