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도(시인, 아동청소년문학 작가)

일상의 지평 위로 예기치 않은 일이 솟아오를 때 우리는 놀람을 경험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근래에 나는 세 가지 일에 놀란 적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됐을 때, 2018년 북한이 기존의 태도를 버렸을 때, 그리고 촛불혁명이다. 미국과 북한, 남한에서 일어난 이 세 가지 일은 나의 개인적 차원의 놀람을 넘어 한반도 정치상황을 뿌리째 뒤바꾸고 있다. 이른바 한반도 평화 국면으로의 전환이다. 이런 국면 전환 속에 2018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역사적이고 격동적인 일들이 연이어 터져 나옴을 보고 있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보자.

트럼프 당선

공화당 후보로 출마부터 비웃음을 샀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아무도 뚜껑을 열기 전까지 그가 당선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선거 전날까지도 거의 모든 방송이 힐러리의 당선 가능성을 80% 이상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그가 됐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를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보고 있다. 우선,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는 저성장을 거듭해 국제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년 간 단 한 번도 무역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미국의 무역적자 원인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이며, 그 폭은 계속 커져만 가고 있다. 트럼프는 이를 고관세율 부과 등을 통해 회복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힐빌리라고 하는 백인 노동자들의 상실감이다. 힐빌리는 미국 남부에 사는 교육 수준이 낮고 보수적 성향을 띠는 가난한 백인을 일컫는 말인데, 트럼프의 선거공약이 이들에게 먹힌 것이다. 미국의 백인 노동자들은 유례없는 실업 위기를 겪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저임금의 중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값싼 수입 제품이 일상 생활용품으로 대체되고 있어 공장에서 물품을 생산할 기반이 줄어들었다는 것과 저임금으로 일하려는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마약, 도박, 폭력, 알코올, 가난에 노출돼 불안하고 우울한 삶을 살아야 했다. 트럼프는 교역 증가와 밀려드는 이주민을 비난함으로써, 경쟁력 잃은 백인 노동자들의 표심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기성정치인에 대한 미국인의 환멸도 지나칠 수 없다. 오바마 재임 동안 미국은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이전 상태로 경제를 회복했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은 이전에 비해 심화됐고, 특히 중산층 비율이 현저히 하락했다. 임금은 고정돼 있는데 실업은 늘고 물가는 올랐다. 그런 판에 오바마 정책을 안이하게 답습하려는 힐러리를 대중들은 외면했다.

결국 트럼프의 당선은 내 코가 석자라는 미국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며, 그것은 바로 철저한 비용 절감과 자국 내 산업 부흥을 통해 중산층 부활을 이루겠다는 트럼프의 전략이 먹혀든 결과였다.

북한의 태도 변화

20171129일 북한은 대륙 간 탄도로켓(ICBM)인 화성 15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국제적으로 핵무기 완성을 선언했다. 화성 15호 미사일은 엔진이 상당히 강력해 미사일 1기에 핵탄두 10개를 장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로써 북한은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국제사회에 천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향후 북한이 핵을 전제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여러 협상을 하려 들기 때문이고(지금 이미 그 협상이 비핵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 하나는 핵무기 개발이 대만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핵무기를 둘러싼 미국과의 공방은 2017년 하반기 들어 한반도에 일촉즉발 전쟁 위기를 몰고 왔다.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북한 핵무기를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대북정책이 북한을 자극해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모양새였다.

그런 기류에 파격을 몰고 온 것은 20181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였다. 그는 신년사에서 책임 있는 핵강국으로 핵무기를 방어용으로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하고, 남한과 평화적 대화를 할 수 있음을 암시한 후 실제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남북-북미 정상회담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후 판문점에서 열린 4·27 남북정상회담,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북미정상회담을 일사천리로 개최해 한반도에 평화 국면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이런 변화를 선택했을까? 북한은 1960년대 이후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추구해왔다. 병진노선이란 경제건설과 군사력 강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으로, 김일성 시대의 경제국방 건설 노선과 김정일 시대의 선군경제 건설노선이 김정은 정권의 경제건설 및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으로 이어져 왔음을 말한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은 핵 무력 강화가 과학기술 발전을 가져와 다른 경제 분야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병진노선은 북한 경제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다.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는 가운데(201547%), 트럼프의 대북제재 강화로 외국자본 유입 자체가 어렵게 됐고, 민생경제 투자를 배제해 자생적 시장화 현상을 더욱 확산시켰다. 게다가 기상 악화로 인한 농산물 생산 저하는 북한 인민들의 생존마저 어렵게 했다.

1990년대 초반 북부지역에서 식량 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자생적으로 농민시장, 야시장, 장마당 같은 비합법적 시장이 생겨났다. 이 장마당에서는 불법 거래 품목인 쌀·옥수수 같은 식량과 공산품들이 거래됐는데, 시간이 지나자 처음의 단순거래 형태에서 상업자본을 축적하는 돈주가 형성됐다.

이 같은 밑으로부터의 시장화 현상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모순을 불러왔고, 국가 통제권 밖에서 발생한 시장을 국가관리 안으로 유도할 필요가 생겨 20027월 기존의 비합법적 영역이었던 소비재 시장을 종합시장이란 이름으로 공식 제도화하는 등 경제개선 관리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종합시장 외의 장사활동, 서비스 업종 및 자영업 발달, 공장 기업소들의 업종 변경 및 돈주와의 결탁 등이 갈수록 광범위하게 이뤄져, 급기야 200911월 종합시장을 철폐하기 위한 화폐개혁(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바꾸고,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은 몰수해 폐기)을 단행했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시장을 적극 활용해 경제 활성화뿐만 아니라 체제 안전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 묶어놓았던 경제활동의 각종 규제를 대폭 풀면서, 국가기관이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개입해 내수시장을 견인하려 하고 있다. 또 온라인 쇼핑몰이나 대형 상점을 건립해 주민의 소비를 국영 부문으로 흡수하려 하고 있고,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이란 개선 조치를 도입해 농장이나 공장 같은 경제단위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인센티브제를 적극 도입하려 하고 있다.

또 김정은 정권은 경제특구로 외자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2013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각 도들에 자체의 실정에 맞는 경제개발구들을 내오고 특색 있게 발전시켜야 한다면서 경제개발구 창설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어 같은 해 5경제개발구법을 만들면서 경제개발구 개발을 본격 추진, 나진·선봉·신의주·황금평 등 22곳을 경제개발구와 경제특구로 지정해 외자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경제 변화는 북한 인민들의 생활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시장화가 발달하면서 휴대폰 보급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는데, 현재 평양시민 80%가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고, 전국에 약 400만 대 이상이 보급돼 있다. 또 북한 내부망인 인트라넷을 통해 전자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택배시스템이 발달돼 평양에 택배서비스 차량이 500~600대에 이른다. 이제 북한 주민들은 전과 같이 다시 고난의 행군에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

김정은 정권은 어떻게든 경제발전을 이뤄 체제 안정화를 꾀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경제제재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오바마 정권이 대북정책으로 취해 왔던 전략적 인내를 폐기하고, UN(국제연합)의 여러 나라들과 함께 대북 경제봉쇄의 끈을 바짝 조였다. 그렇긴 해도 그동안 북한은 나름대로 큰 동요 없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버텨왔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것이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에 소극적이었고, 3세계 국가들 가운데 북한에 우호적인 나라들과 보이지 않은 교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돌연 심각한 변수가 생겼다. 그동안 대북제재에 부정적이던 중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예부터 정치적 혈맹관계였고, 경제적으로도 대중 의존도가 높았다. 그래서인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수위가 높아가는 데도, 중국과 북한의 무역 수치는 오히려 더 늘어만 갔다. 그런 중국이 최근 태도를 바꿔 대북제재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중국이 그렇게 태도를 바꾼 가장 큰 이유는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쇠퇴시켜 그들이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우뚝 서기 위함이다.

아무튼 민생 해결과 경제발전을 통해 정권의 안정과 성공을 꾀하려던 김정은 정권에게 중국의 태도 변화는 치명적이었다. 그리하여 경제발전을 통해 민심을 얻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김정은 정권은 핵무기 완성 선언과 함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2018년 핵무기를 방어용으로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한 신년사에 이어 평창 올림픽 참가, 그 후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체제 보장과 비핵화 테이블에 나오게 된 것이다.

평화 국면을 견인하는 두 가지

지난 25년 동안 북핵을 둘러싼 북미 간 공방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예전에도 남북 혹은 북미 간 화해 모드는 있었다.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고위층 간부가 상대국을 방문해 관계 개선을 도모하기도 했다. 핵 문제에도 그러한 반짝 진전이 있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하기도 하고, 미국 요구에 의해 핵사찰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들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남··미 간의 일들은 예전에 있었던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한마디로 예전에 있었던 일들이 이벤트성이 강했다면, 2018년 들어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평화체제 구축의 필요성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남··미 간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 지금은 서로가 원하고, 또 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단계에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평화 국면이 전과는 다르게 쉽사리 깨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또 상대적으로 이번 평화체제 구축 노력이 실패할 경우, 한반도에 전쟁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올 수도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2018년 한반도에 평화 국면을 불러온 중요한 두 요소는 핵과 경제다. 일차적으로 북한은 핵을 담보로 하는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미국은 안보, 다시 말해 비핵화 필요성에 의해, 남한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만이 살 길이라는 절박함에 의해, ··3국의 전략·전술 밀당이 협상 테이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현 시기 평화 국면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말은 평화 국면이지만 현 시기 협상의 당사국들은 각국의 명운을 건 치밀한 계산과 기싸움에 임하고 있다. 그렇다고 섣불리 협상판을 깨지도 못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지금의 협상 국면이 남··미 모두 막다른 단계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선 당장은 북미 간의 밀고 당기는 틈에 남한이 자주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지만,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중국·러시아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곧장 덤벼들 태세다.

그러나 서로(혹은 어느 한쪽)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전쟁 같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이미 충분히 엿보인다. 비핵화가 논의되고 있는 현 시점에 미국이 북한에게 뜻대로 안 될 경우 북한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나, 전쟁 시나리오 검토, 핵태세검토보고서(NPR)의 내용만 봐도 그렇다.

핵태세검토보고서는 미국 행정부가 발간하는 핵관련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핵정책과 연관이 깊으며 8년 주기로 작성된다. 지금까지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와 2002년 조지 부시 행정부, 2010년 오바마 행정부, 그리고 2018년 트럼프 행정부까지 총 4번 발간됐다. 올해 22일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발표된 핵태세검토보고서에는 앞으로 8년 간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안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는 중국·이란·북한 등의 불량국가가 미국에 대해 다양한 비핵무기로 전략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극한 환경에 대해 새로운 신형 저강도·농축 핵무기로 대처하겠다라고 명기, 해당 국가에 필요하다면 핵무기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음을 밝혔다.

톺아봐야 할 몇 가지

미국의 비핵화 요구

비핵화와 관련해 한 가지.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비핵화란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말한다. 즉 남북한 모두에 해당하는 비핵화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북한에 대한 비핵화로만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에 대해 북한은 미국에 체제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 틈에 남한은 새롭게 조성된 평화 국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정전협정을 폐지하고,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맺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이 주장하는 비핵화 내용은 CVID,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CVID 가운데 완전과 검증 가능은 실현가능하다. 한반도에 핵무기를 몰아내고 들여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확인하면 된다. 문제가 될 것은 불가역적이다. 불가역이란 돌이킬 수 없는’, ‘원래 처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이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다시는 핵무기를 만들 수 없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핵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과학기술(기계공학·원자력공학·컴퓨터공학 등)마저도 폐기해야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는 북한이 망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런데 이 불가역적이란 말이 비핵화 내용에 떡하니 들어가 있다. 함정이 아니겠는가? 할 수 없는 영역을 요구사항에 넣어 끝까지 꼬투리 잡아 협상을 파행으로 몰아가려는 속셈이 아닐까?

CVID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재임 때 수립한 북한 핵문제 해결의 제1원칙이다. 그러나 북한은 과거 북핵 6자 회담 당시부터 이 표현이 패전국에나 강요하는 것이란 등의 이유로 반발해 왔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미국은 북한과 협상할 때 CVID 대신 ‘FFVD’(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 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라는 표현을 쓰도록 지침을 내렸다. 이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그런 것인데,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에 의하면 의미는 똑같다고 한다.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은 어떻게 이뤄지나?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내용은 아직 없다. 다만 몇 가지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북한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체제 안전보장은 우선 대북제재 해제이고, 그와 함께 종전선언에 이은 평화협정 체결, 불가침 선언, 더 나아가 북미관계 정상화일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핵우산 철폐,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나 철수, 한미동맹의 철폐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을 어떤 형식과 절차를 거쳐 보장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북의 체제안전 보장과 관련해 이런 생각들이 갈마든다. 역설적으로 미국과의 적대관계 유지가 김정은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왜 북한은 미국에 체제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하는 걸까? 또 비핵화만 실현되고 체제 안전보장이 안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가서 이빨 뽑힌 호랑이 같은 북한은 어떻게 할까? 그리고 미국은 북한의 체제 안전보장에 드는 비용을 전적으로 남한에 부담시키려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미국은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푸는 식으로 한반도 핵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을까?

남한의 경우

남한의 목표는 정전협정 폐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이다.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유례없이 70여 년을 정전 상태로 지내왔다. 19537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는 UN군 총사령관(미국), 북한군 최고사령관,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이다. 정전협정은 판문점에서 체결됐으며, 6·25전쟁 정지와 평화적 해결이 이뤄질 때까지 모든 무장행동과 적대행위를 정지하기 위해 체결됐다.

정전협정에 남한은 서명 당사국에서 빠져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하나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전협정에 반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법적으로 한국은 작전지휘권이 없기 때문에 군사령관끼리 하는 정전협정에 자격이 없어서였다.

평화협정은 정치적·국제법적으로 평화를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분쟁종식 방법이다. 평화협정은 한반도 평화협정이 돼야 하며, 서명 당사국은 한국·미국·북한·중국이어야 한다. 북한은 미국과 단독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싶어 북미평화협정을 주장하지만, 이는 한국과 중국이 반대해 성사되기 어렵다. 한반도 평화협정 당사국 문제는 이미 2007년 한국·미국·북한·중국 간 합의가 끝난 문제로, 200710·4 공동선언(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북한은 한국의 평화협정 당사자 자격을 완전히 인정한 바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다르다는 점이다. 종전선언은 한반도의 정전상태가 끝났음을 남···중 당사국들이 그야말로 선언하는 것이다. 선언은 선언에 그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선언 그 자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평화협정이 체결돼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로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폐기하고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며,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을 동시에 해체하고, 한반도에서 군축을 단행해 남···중 어느 쪽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북핵 문제 해결을 논의하기 위한 6자 회담이 있어 왔다. 6자 회담은 북미를 중심으로 나머지 국가(남한·일본·중국·러시아)들이 각국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모인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남한과 일본은 미국이 자국의 부담을 덜기 위해 끌어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핵심 사안에 대한 실질적 논의가 어렵고, 의미 있는 결정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앞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 기존의 6자 회담보다는 평화협정 체결 당사국이 될 4개국 (···) 회의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자국의 이득을 위해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평화협정 당사국이 아니다.

평화는 곧 삶의 문제

문재인 대통령이 918일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다시 갖는다. 지난 4·27 판문점에서 양국 정상은 남북관계를 예전에 비해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 교류와 협력을 제도화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번에 열리는 평양 정상회담의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상시적이고 안정적인 남북관계를 가져오는 일이다. 4·27 판문점선언에서 양국 정상은 합의문을 통해 정상 및 분야별 회담의 정례화와 남북관계 제도화 인도적 문제 해결 남북 경제협력 및 교류에 대해 합의했다. 예전에도 남북 정상 간 합의 내용이 있었지만, 정권이 바뀌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묻히거나 폐기되다시피 했다. 이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합의 내용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지루하게 이어질 비핵화 국면에서 한반도의 주인으로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이후 최근까지 진행된 비핵화 논의가 난항을 겪으며 교착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군부 등 강경파의 거부로, 미국은 의회 등 내부 보수파들의 반대 여론으로 협상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 문 대통령의 정상 간 중재 외교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비핵화 프로세스에 대한 진전된 입장을 들은 뒤, 이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해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돌파구를 이끌어내야 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았던 게 엊그제였다. 다행히도 여러 여건 변화가 평화의 훈풍을 몰고 왔고,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는 평화체제를 구축할 기회를 맞고 있다. ··미 간 여러 협상이 평화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남한에서 추동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상황 변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민의가 한 곳(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으로 모아져야 한다. 불확실성이 너무 큰 상황이라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각 분야마다 교류의 폭을 넓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간 긴장을 줄이면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오랫동안 전쟁 위험과 불안 속에 살아온 우리들에게 평화는 곧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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