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나섰다가 퇴학을 당한 한 학생의 이야기였다. 가슴 뜨거운 시절 서러운 나라를 대변하려던 학생은 그 날로 인생이 절단났다. 더이상 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그 이후 가방끈은 질리게도 이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퇴가 전부였다. 줄을 잘못 섰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한낱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변하지 않을 거대한 힘에 기대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섬세한 그의 펜은 조선일보에 징용과 위안부와 학도병의 일화를 찬양했다. 감성이 담뿍 들어간 그의 글은 청년들을 설레게 했다. 유려한 글에는 그러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3년이 채 안 되어 일본은 폐망했다. 일본이 그리 쉽게 망할 줄 몰라 적잖히 당황했던 학생이었다.

괜찮다.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학생의 아버지는 마름이었다. 소작농들의 거머리이자 지주의 하수인이었던 아버지는 손가락질을 달고 살았다. 애비는 종이었다. 유독이 똑똑한 아들이 면서기가 되어 나랏돈 받는 게 소원이셨다는데 서울까지 보내놓고 퇴학 당하는 꼴을 봐야 했다. 그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차세대 능력자를 찾았다.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자서전을 써서 이제는 숨통 좀 트이나 했더니 그 조상의 이름 뒤에 존칭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조리 소각됐다. ‘잠시 조용히 살자. 죽으란 법은 없다.’ 곧 박정희를 위한 지지선언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박목월의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다. 7전8기라 했다.’ 때 맞추어 전두환이 등장했다. 학생은 늦을세라 56세 독재자에게 생신 찬양 시를 바쳤다. 방송으로 시대의 구원자가 나타났다고 연일 떠들었다. 드디어 대통령의 따뜻한 눈빛이 학생에게 닿았다.

새털 구름 같이 고운 시를 쓰는 학생은 자신을 가르친 8할이 바람이라 말했다. 옥수수를 좋아하는 아내가 떠나자 곡기를 끊고 그길로 따라나선 마지막도 순박한 그 학생은 바로 미당 서정주였다.

학생은 어느덧 86세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 사이 교수가 되고 시인이 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그는 이미 스스로 강한 사람이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멋진 시를 남기고 한마디 뉘우침도 없이 그렇게 가버렸다. 잘 좀 봐달라는 유언은 시구 같았다. 순수하지 못한 순수 시인의 꽃같이 순수한 시를 나는 순수하게 받지도 못하고 못 받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고창 바람이 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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