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우도암행어사별단.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충청우도암행어사별단.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왕조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중앙통치조직을 구성하고, 군현제를 바탕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정비해갔다. 중앙 관료들이 무능하거나 비리를 저지른 경우 언론·감찰기구였던 대간(臺諫)이 적발할 수 있었지만, 수령과 변장 등 지방관은 통제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위해 국왕은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시하고 백성의 질고(疾苦)를 직접 살피게 했다.

19세기 끝자락까지 파견된 암행어사 중에는 이름 있는 인물이 꽤 있었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도 그 중 한명이다.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시대 정당정치의 역사를 기록한 ‘당의통략’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저자가 바로 이건창이다. 이건창의 가문은 소론 계열로 영조대 이후 정계에서 멀어져 강화도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로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건창의 조부 이시원은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기려 강화도에서 별시를 실시하였고, 여기에서 이건창이 급제하였다. 그는 교리, 헌납, 부수찬 등 청요직을 지내다 1878년에 충청우도(현재 충청남도 권역)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27세의 청년 이건창이 바라본 19세기 후반 충청남도 서해안의 사회상은 어떠했을까? 이를 담고 있는 자료가 ‘충청우도암행어사별단’이다. 별단(別單)은 암행어사가 지방관의 근무실태를 조사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서계(書啓) 뒤에 첨부되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암행어사가 현장을 직접 살피며 파악한 지역 현안에 대한 개선책이 수록되어 있다. 이건창은 보령, 안흥, 서천, 한산, 홍성, 태안, 당진 등 충청도 서해안 일대를 두루 돌아 다녔다. 그리고 서해안의 전토가 개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는 문제, 사환미를 중앙으로 상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 충청우도 수령들이 부족한 지방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의 전답을 침탈하는 문제 등 19세기 후반 충청우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 아울러 서해안의 해적을 쫓는 수토군의 활동, 한산의 양반 이창하를 따라 죽은 여흥민씨의 일화, 노성의 참봉 윤상갑의 학행도 수록하였다.

그 중 이건창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현안은 바로 소영(蘇營)이라 불리는 충청수영과 보령, 안흥진과 태안의 통폐합 문제였다. 이 시기 조선은 두 차례의 양요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운양호 사건으로 인해 해양방어 즉, 해방론이 한창 대두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군사담론에 따라 서해안의 거점 방어시설인 충청수영과 안흥진을 강화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보령은 충청수영으로, 안흥진은 태안으로 각각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건창은 이 군사정책이 오히려 방어체계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행정체계를 복잡다단하게 만들어 연해지역 백성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며 반대하였다. 해안방어를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이곳을 지킬 백성의 삶이 힘들다면 그 방어체계는 무의미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서해안을 돌아다니며 만난 현장의 소리를 반영한 의견이었다. 결국 이건창의 주장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그러나 철저하게 백성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던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광균(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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