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모 한남대 사학과 교수

 
이진모 한남대 사학과 교수

 베를린 장벽이 제거되던 날이 기억난다. 엄혹한 냉전의 상징, 콘크리트 장벽 한 부분이 기중기에 의해 들어 올려 지면서 반세기 분단 장벽을 넘어 마주한 독일인들은 환호와 함께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눈물 흘리는 장면을 평생 본 적 없다.” ‘슈피겔’ 기자는 역사적 현장의 감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헬무트 콜 수상은 “동독은 곧 꽃피는 땅, 번영하는 지역이 될 것”이라고 외쳤고 주민들은 환호했다. 그로부터 1년이 안된 10월 3일, 독일은 역사적인 재통일을 이뤘다.

물론 난관도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주변국들은 통일에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프랑수아 미테랑도, 마가렛 테처도 강력해진 독일이 유럽에 미칠 변화를 원치 않았다. “나는 독일을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독일이 둘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노골적인 반대를 표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독 주민들의 거침없는 이주 물결, 그로 인한 동독 사회의 와해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현실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한 헬무트 콜 정부는 1년 전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았던 역사적 위업 달성에 성공했다. 통일의 열기가 식기도 전인 1991년 고르바초프는 실각하고 소련이 15개 독립국가로 분리됐다. 1년만 지체됐어도 통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통일 1년 후. 동독 시절 유럽 최대 갈탄 생산지이자 이상적인 계획도시였던 호이어스베르다에서 외국인 혐오 불길이 솟았다. 통일 후 대규모 실업, 취업난과 함께 극우세력이 득세하면서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정서가 악화된 결과였다. 네오나치 500여 명이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를 습격해 불이 났다. 불타는 아파트를 보며 박수를 보내는 동독 주민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이것이 호이어스베르다에 국한된 예외적 현상이 아니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1만 3815개 가운데 1994년 말까지 66개를 제외한 모든 기업이 매각 또는 청산된 동독 국영 기업 구조조정, 그로 인한 대량 해고, 사회복지 예산을 둘러싼 갈등 등이 초래한 심각한 결과였다. 내적 통일은 요원하기만 하다는 심각한 자성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행히 이후 정치권과 성숙한 시민사회는 극우파 확산을 막아냈고 동독은 안정을 찾았으며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뤘다. 오늘날 동독 지역에서 과거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여전히 동·서독 임금 격차가 존재하고 실업율 차이도 있지만 많은 지표는 통일의 획기적 성과를 보여준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려는 동독 주민은 거의 없다.
이런 저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 국제정세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용, 통일의 기회를 거머쥔 서독 정부의 외교역량은 놀라웠다. 하지만 오늘까지 통일 독일을 건설한 독일의 저력은 무엇보다 경제, 복지를 동시에 추구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패전의 잿더미 위에 이룩한 비약적 경제발전에서 나왔다. 경제 성장을 토대로 전 분야에 걸쳐 이룩한 민주화, 안정되고 건강한 시민사회가 그 저력이었던 것이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긴박하게 진행 중인 남북 대화와 북미 협상,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 노력은 괄목할만한 발전이다. 하지만 독일이 보여주듯 언젠가 다가올 통일 후 우리 사회가 직면할 문제는 그리 녹록치 않을 게 자명하다. 헬무트 콜이 ‘꽃피는 동독’을 얘기할 때 ‘우리가 함께 노력한다면’이란 조건을 달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감상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추상적인 통일대박론을 극복하고 이제 ‘떠나고 싶은’ 나라가 아닌 ‘살고 싶은’ 우리의 미래를 기획해야 한다. 통일에 분단 극복, 민족 화합, 평화 정착의 과제를 넘어서 보다 현실 개혁적이고 미래 지향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 사회에 만연한 정치 혐오, 부정부패, 무너지는 학교, 물신주의와 사회계층 양극화, 오염되는 자연, 파벌주의, 떨어진 도덕성 등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혁하는 게 통일로 가는 대장정의 시작이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소원 통일은 감상적 꿈이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사회, 자유, 평등, 정의가 넘치는 사회를 위한 획기적 계기이자 끊임없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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