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소설 속에는 유독 슬픔을 겪은 후 삶을 살아내는 이야기가 많다. 그는 ‘상실 이후의 삶을 그저 견디어 내는 숭고한 보편성에 보다 가치를 두고 있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오직 두 사람〉, 〈너의 목소리가 들려〉, 〈살인자의 기억법〉 등에서 독자는 상실과 슬픔의 감정을 객관적인 묘사와 메마른 정서로 강렬하게 마주한다.

〈검은 꽃〉은 그가 2003년에 쓴 초기 대표작으로 ‘애니깽’이라고 불리는 멕시코 이민 1세대의 슬픈 삶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가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직접 다녀온 후 지은 소설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05년 4월,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떠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은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행 일포드호에 몸을 실었다. 갖은 고생을 하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에네켄 대농장 아시엔로. 그곳에서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멕시코 농장주의 횡포, 고된 노동과 학대였다. 특히, 온종일 일을 해도 식료품값이 더 비싸 늘 빚진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대농장주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해 그들의 배만 불리고 있었고 조선인들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간의 처절함과 세상의 냉혹함을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 서술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겪어내는 왜곡된 세상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아낸다. 거대 자본의 횡포, 전통신앙과 천주교, 개신교 간의 종교 갈등, 나라 잃은 백성들의 정체성 혼란 등을 역사 흐름에 맞게 입체적으로 그린다. 과연 그들이 희망을 품고 떠나온 멕시코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이야기에서 희망과 행복이란 단어는 없었다. 오히려 가족과 고향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그렇게도 돌아가고 싶은 고국이었다. 서로 사랑했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던 주인공 이정과 연수처럼 그들은 엇갈린 운명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다. ‘검은 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꿈꾸던 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과 고통을 그려낸 〈검은 꽃〉을 읽다 보면 요즘 ‘난민’ 사태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시대가 다르지만, 우리나라도 나라를 잃어 난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110년 전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슬픔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이명숙(충남학생교육문화원 문헌정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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