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는 놀이터에서 다른 동무들과 놀거나 엄마 아빠와 함께 기쁘고 즐겁게 이야기하거나 장난치는 어린아이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주 큰 기쁨이요 행복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저 어린아이가 살아나갈 길과 노는 땅이 평탄하고 아름답고 평화롭기를 간절히 맘 속으로 빈다. 희망이 가득한 그들 앞에 어떤 너무 힘든 장애가 없기를 빈다.

초등학생들이 한두 가지 좋은 지식을 얻어 동무들과 함께 마치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은 것처럼 뻐기고 자랑하는 것을 거리를 걷다가 엿들을 때도 아주 참 놀랍도록 기쁘고 즐겁다.

언젠가는 그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이 얕고 좁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그래도 어떤 숨겨진 진리를 찾은 듯이 우쭐해지는 것은 얼마나 강력하고 단단한 삶의 기초를 주는 것이던가? 또 중·고등학생들이 거리를 삼삼오오 무리지어 지나갈 때, 그들을 바라보는 것 역시 하나의 기쁨이다.

활력이 넘치고 생기가 있으며 신선한 기운이 그 주변에도 퍼진다. 비록 그들이 쓰는 용어들, 자기들끼리 정답게 주고받는 말들이 어른들이 듣기에는 좀 거칠다고 느껴질지라도 그 놀라운 기운 속에 내 스스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저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구나 싶다.

그러다가 대학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약간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된다. 물론 거기에도 어디에 비교할 수 없는 활력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과 당당함과 의젓함과 놀라운 탐구력에 빛나는 눈빛과 발걸음을 발견한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낭만이 있으면서 알 수 없는 진리에 도전하려는 의지의 얼굴들이 있으면서, 또 다시 밑 모르는 좌절을 맛보는 얼굴들이 있다. 그냥 학문을 연마하고 미래를 꿈꾸기에는 너무나 현실이 폭폭하기에, 그것을 미리 바라보는 그 맘속에는 살짝 어떤 검은 구름이 끼어 불안한 미래를 가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젊은 기운이 잠깐 주춤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 때 여기에 어떤 자유롭고 광활한 곳을 활보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래서 젊은이들이 숨 쉬는 학교 캠퍼스를 돌아보기를 즐긴다. 거기에 분명히 귀한 희망이 있고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내를 걸어본다. 낮에는 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이들을 저녁이 되면서 하나둘 스쳐 만나기 시작한다. 교복은 입었으나 지금은 학생이 아니고, 부모는 있으나 지금은 홀로이며, 어디에선가 자기는 하겠지만 안전하게 잘 수 있는 곳을 가지지 못하며, 팽팽한 젊음을 가지고 있으나 풍기는 그 기운이 어둡고 우울하며 축 늘어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이 있을 듯하지만 갈 곳이 없다고 하고, 그들을 찾을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대낮보다는 어둑한 날에 나다나기를 좋아한다. 충분히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감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단다.

엉거주춤을 넘어 무기력함을 가진 듯이 보이는 이들, 물론 그들에게서도 굉장한 에너지와 기운을 느끼지만, 어쩐지 부드럽거나 안전함 보다는 불안함을 안겨 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들이다. 이른바 ‘학교밖청소년들’이다.

학교 밖이기 때문에 교육부의 관여 대상도 아니란다. 대개 이러한 청소년들은 가정의 손을 떠났기 때문에 여성가족부의 관심대상에서도 멀다.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가 아니고, 보건복지부에서 큰 관심을 가지는 어른도 아니기에 그런 정책에도 반영이 되지 않는다. 온갖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서울시 교육청에서 학교밖청소년들에게 한 달에 20만원씩을 교육에 쓸 수 있도록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학교라는 공식 교육기관이 맘에 들지 않아 혼자서 스스로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공부하거나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건사할 맘이 없고 능력을 아직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 관여할 공식 기구와 법률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전국 주요도시에 그들이 쉴 수 있는 임시, 단기, 장기 쉼터가 몇 종교단체들이 관여하여 운영되고 있지만, 지금은 상징행위에 불과할 만큼 부족하다. 관계하는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지만 사회 전체의 관심은 따뜻하지 않고, 처벌과 무관심과 외면과 멸시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를 생각한다. 학교밖청소년들을 염려의 대상, 어떤 범죄행위가능성의 존재로 보아야 하는가? 밝고 맑은 맘으로 일반적으로 대화하고 희망을 품고 사랑과 행복을 나눌 귀중한 존재로 볼 수는 없는 것인가? 아직 법률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여 여기저기 관련부서들이 책임을 공 던지기하고 말아야 하는 것인가?

가만히 보면 그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 그들 중에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학교로부터 무시를 당하였거나, 친구들로부터 아주 크게 따돌림을 당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정신발달이 지체되거나 인지능력이 좀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린 나이에 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를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꼭 같은 문제를 재생산하는 수가 많다.

그런데도 지능이 뒤처지고,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학교의 굄을 받지 못하며,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사회에서 쓰임새 있게 발휘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취급되는 사람들끼리만 교류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 얼마나 귀한 인간존재들인가? 그 숫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적응할 사회를 금방 만들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따뜻하고 실제적인 관심을 가질 제도를 만들고 사람들을 길러서 떳떳이 살 수 있는 길을 열 수는 없는 것인가?

나는 학교밖청소년들과 깊게 사귀고 싶다. 그런데 내 능력과 처지로는 접근할 수가 없다. 문제는 이렇게 개인 차원의 관심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의 자녀로, 학생으로, 이 사회의 귀중한 구성원으로 받아서 공동으로 관심을 가지는 정책과 사회문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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