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가지 말았으면 좋았을 답사였습니다. 한동안 삶과 죽음에 깊이 노출되었던터라 지금은 맑고 밝은것에 맘을 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삶은 계획된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비석이 나자빠져 있고 사람이 몰려있어 올라섰습니다. 무슨일일까? 1951년 2월 7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시골마을에 들어섰습니다.

자동차도 가까이 본 적 없던 마을에 국군이 차를 타고 들어오자 온 동네가 만세 부르며 호기심에 술렁입니다. 지리산을 낀 채 좁은 다랑이 논에서 농사짓고 약초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남쪽에 남은 빨갱이가 지리산에 숨어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킨다”며 신원초등학교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까지 업고 삼대가 몰려나왔습니다. 그랬더니 군, 경, 공무원 가족들은 잠깐 조사할것이 있다고 남으라 했습니다. 남고 싶어서 나선 사람들은 박영보 면장이 골라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가보다 하며 단단히 챙겨입고 군인을 따라 걸어내려갔습니다. 살 곳으로 데려간다더니 점점 깊은 산속으로 갔습니다.

이 길로는 산을 못넘습니다. 손바닥같이 빤한 동네를 처음 온 사람들이 뭘 안다고 길잡이가 된건지 몰라도 6·25도 막아낸 국군이니 믿었습니다. 군인들이 잠시 계곡으로 내려가라 했습니다. 여긴 길이 없다 말해줘도 듣지도 않고 내려서라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얼추 사람들이 내려서니 갑자기 불꽃이 보이며 천둥같은 총소리가 수백 차례 들렸습니다. 그렇게 그날 719명이 한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은폐하기 위해 기름을 뿌려 불태워버립니다. 가족 시신 수습하러 왔던 친지들도 삼 개월이 넘게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그렇게 방치하다 삼년이 지난 어느 날 찾아가보니 뼈만 수북히 쌓여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뼈는 남자, 중간뼈는 여자, 작은 것은 애기들로 나눠서 무덤 세 개를 만들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에게 비라도 하나 세워주자고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어쩌면 덮여질 일이 한국전쟁을 취재하고자 온 외신기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보도됐습니다. 심지어 특별조사를 위해 들어오던 국회 조사단을 인민군복장을 한 11사단 군인들이 폭행하는 사건도 벌어집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에 외신은 기사를 이렇게 남깁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싹트길 바라는것 보다 쓰레기장에서 장미꽃 피는 게 빠르다”.

긴급조사가 이뤄져 재판이 진행됐으나 주동자인 김종원, 오익경, 한동석, 이종배 모두 특별사면돼 풀려나 승승장구합니다. 곧 4·19가 터졌고 거창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진상이 알려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거창사람들은 박영보를 끌어냈습니다. 도망치는 그를 돌로 내려치고 불에 던졌습니다. 곧 박정희는 진상규명에 참여한 대표단 17명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이 사건을 빌미로 비석을 정으로 쪼아 땅에 묻었습니다. 심지어 무덤도 파헤치라 지시했습니다. 겁에 질린사람들은 또 죽을까봐 억소리도 못하고 급하게 무덤의 흙을 한줌씩 나누어 가졌답니다.

그렇게 군사정권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섭니다.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다시 비석을 세우자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창은 거부합니다. “바람불면 또 변할 팔자, 다시 세운다고 뭐가 달라지겠능교. 다 밝혀질때까지 그냥 눕혀두소. 썩은 속이 풀리도록 조사가 옳바르게 마치면 지가 벌떡 일어나서 꽂힐텐께. 그냥 두소”

그렇게 오늘도 누워있는 비석이었습니다. 파도 파도 끝이없는 이 땅의 아픔을 또 만나고 옵니다. 그날 어린이가 359명, 노인도 71명이죽었습니다. 대부분 여자였습니다. 죄명은 빨갱이와 내통한 죄, 작전명은 손자병법의 견벽청야였습니다. ‘심장은 지키고 그 외 지역은 과감히 포기한다.’ 손자도 비웃을 전법에 그날 대한민국의 심장이 멈췄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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