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의 저기압이 한반도를 향해 천천히 내려오자 단풍과 은행 역시 어느덧 대청호를 넘어 금강까지 왔다. 이제 막 고개를 내민 붉은 단풍, 노란 은행은 아직은 어색한지 가을비, 그리고 안개와 함께 대청호오백리길에 머물며 노닌다. 금강과 단풍, 은행이란 환상적인 조합에 가을비까지 한 곳에 어우러지는 모습은 이제까지의 경험상 절대 길지 않다. 이들이 떠난 자리는 하얀 소복이 내려 앉아 연말이란 시간의 서러움에 묻히리.

◆금강, 그리고 가을비
대청호오백리길의 11구간은 10구간의 마지막인 안터마을에서 시작한다. 10구간 땐 힘이 들어 마을의 풍경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이른 아침의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조용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과 곳곳에 집을 친 거미들, 그리고 시골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견공들의 인사까지.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봐도 채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안터마을은 초입을 비롯해 갈림길이 약 3곳이나 된다. 우측의 갈림길로 가야 제대로 된 길이다.

11구간은 전체적으로 등산이라기보단 임도의 오름이 연속이다. 첫 발걸음 역시 임도의 오르막으로 시작한다. 오르막이라지만 초입은 잘 포장된 임도여서 걷는 데엔 무리가 없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울창한 수해(樹海)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포장된 임도는 찰나의 순간처럼 끝난다. 그러나 울창한 나무의 숲 덕분에 머리위로 내리는 촉촉한 가을비를 피하며 걸음을 뗄 수 있다. 그리고 바닥에 앉은 가을의 갈색 흔적들이 푸석하게 부서지며 발로 전해지는 중력의 무게감을 최소화시킨다.

짧은 임도의 아쉬움이 다행스러움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다람쥐들이 단체로 소풍이라도 온 듯 낙엽과 함께 널브러진 솔방울과 가을비가 단풍과 은행에 내려앉는 소리가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곧바로 땅에 내려앉은 빗방울은 흙내음을 갖고 기체로 변한다. 가을비 냄새다. 아직은 금강이 보이지 않지만 가을비가 전해주는 하나의 전율이 몸속을 타고 오른다. 이 전율은 전희가 된다. 전희의 연속성에 내성이 생겼는지 몸은 이전보다 더, 그리고 또 다른 자극을 강력하게 원한다. 그 순간 거세진 비를 피할 큰 나무가 나온다. 그리고 더욱 큰 전율과 전희를 갈구하는 하찮은 몸뚱아리가 만족할 만한 게 나온다.

금강과 금강을 둘러싸는 작은 산, 그리고 그들이 하얀 목도리처럼 둘러싼 산 중턱에 내려앉은 안개까지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아직 지치지도 않은 발걸음을 붙잡는다. 단풍과 은행에 익숙해진 시각에 또 다른 전율과 전희를 불어넣는다. 그들이 주는 흥분감에 발걸음은 저절로 멈춘다. 가을비가 내려앉은 흙바닥만 아니었으면 다리가 풀렸으리. 그만큼의 절경이다. 그리고 엄습해온다. 이 절경에 익숙해졌는데 앞으로 이를 만족할만한 절경이 또 나올까?

걱정과 기대는 30분도 안 돼 사라져버린다. 작은 오름의 끝에서 시작된 내리막이 작은 데크와 곧바로 시작된다. 짧게 포장된 임도를 제외하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걸 본적 없는 11구간에서 데크와의 만남은 의외였다. 그러나 왜 데크가 설치됐는지 인지한 건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데크 끝에 가보니 작은 전망대가 ‘같이 가요. 대청호오백리길’의 나그네들을 맞는다. 그리고 선보인다. 이 시기에 금강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매력을.

넓게 펼쳐진 우리네 젖줄을 보호하는 산들이 알록달록 색옷을 갈아입으며 안개까지 둘러댄 모습은 아까의 절경을 뛰어넘어버린다.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에 빠져버린 나그네를 깨우는 건 가을비다. 그러나 야속하지 않다. 달팽이관을 자극하는 가을비까지 사위일체를 이루고 있어서다. 각자의 모습도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는데 이들이 한 곳에서 이뤄진 모습에 어느 누가 빠지지 않을까. 그렇게 그들은 이곳에서 짧게나마 자신의 아름다움을 열심히 뽐냈다. 그래서 나그네들은 더욱더 그 자리에 머문다.

◆금강은 없지만 나름의 절경을 보여주는 탑산
절경에 빠져도 제 할 일은 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가파른 내림의 곡선을 따라 걷는다. 내림 역시 짧게 끝나며 완만한 길이 쭉 이어진다. 피실로 향하는 길이다. 절경의 연속이 이어진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다. 피실이란 역사는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명(明)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나라에서 원군을 맡은 장수는 이여송(李如松)으로 행군 중 이곳을 지나다 갑자기 신이 나 말을 타고 힘껏 달렸다. 그리고 대뜸 자신의 화살과 말 중 누가 빠를지 궁금했다. 이에 활을 들고 화살을 날린 뒤 곧바로 자신의 말을 달리게 했다. 그러나 화살이 너무 빠른 나머지 이여송은 화살의 방향을 놓쳤고 자신의 말이 화살보다 늦었다고 생각하며 목을 벴다. 그 순간 화살이 이여송 앞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경솔을 후회했으나 말은 벌써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피실의 어원이다.

사실 피실은 대청호오백리길 11구간의 정식 구간은 아니다. 피실삼거리에서 청마리로 향해야한다. 피실까지 왕복으로 약 1시간 30분이 걸리기에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이번엔 청개구리 심보로 피실로 가보기로 했다. 생각지 못한 절경을 볼 수 있을 것이란 마음이 컸다. 피실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정적이다. 잘 펼쳐진 길 양 옆에 호위무사처럼 나무들이 쭉 들어서며 차가울 수 있는 강바람을 막아준다. 단풍과 은행은 이곳에 들지 않았지만 신록의 마지막을 뽐냈던 초록의 잎에 내려앉은 빗방울, 금강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 그리고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갈대와 억새의 흔들리는 소리만이 이곳에 남는다. 가을 정취를 느끼기엔 이전 절경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정적인 이곳에선 다른 감정을 느낀다. 평정심. 오히려 더욱 편안해진다. 그래서 담백하고 더욱 머물고 싶어진다.

피실로 향하는 길섶에 코스모스와 은행나무숲이 담백함 속에서 하나의 포인트로 작용한다. 잠시 피실로의 외도를 끝내고 피실삼거리로 돌아와 청마리로 향한다. 이곳은 이제까지와 조금 다르다. 이때까진 낙엽과 흙이 있었지만 이곳은 자갈돌로 이뤄진 길이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 오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탑산이다. 드디어 땀을 흘릴 수 있겠으나 그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오르막도 제법 가파른 데다 젖은 도로는 자칫 위험할 수 있어 발걸음엔 속도가 붙지 않는다. 바로 옆은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힘도 배로 든다. 그래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향한다.

빗방울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연신 떨어진다. 갑자기 촉촉하게 오던 가을비가 대차게 쏟아진다. 가을장마인가보다. 다행히 주변의 큰 나무를 찾아 잠시 몸을 숨긴다. 그제야 겨우 한 숨 돌리며 모르는 사이에 올라온 고도가 실감된다. 가을이 흠뻑 찾아왔지만 자리를 비키지 않는 신록과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가을의 단풍이 기 싸움을 벌이는 산의 색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눈은 피곤해하지 않는다. 곳곳에 둘러앉은 하얀 안개가 서로를 내년으로 보내려는 그들의 싸움을 중재한다. 그리고 챙겨온 컵라면을 꺼낸다. 고도 430m의 탑산을 아직 정복하지 않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허기가 더욱 컸다. 허기를 달래고자 쉬는 자리였지만 비가 조금 그칠 때까지, 컵라면에 커피까지 홀짝 마시고도 꽤 긴 시간을 쉰다.

빗방울이 조금 약해졌을 때 얼른 박차고 일어나 일정을 마무리하고자 속도를 내본다. 눈앞에 보이는 오르막을 주파해버리자 내리막의 연속이 이어진다. 나그네들 모르게 정상을 지나쳤나보다. 그러나 아쉽진 않다. 11구간이 주는 절경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굽이치는 내리막을 계속 걷다보니 또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으로 가면 오르막이고 왼쪽으로 가면 내리막이다. 다행히도 왼쪽이 정식 구간이다. 내리막이 계속되는 동안 오히려 주변 숲은 더욱 울창해진다. 빗소리는 들리지만 머리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단 말처럼 종점이 다가올수록 더욱 울창해지나보다. 내리막의 끝에는 11구간의 마지막인 청마초교가 나온다. 예전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울렸겠지만 이젠 이곳은 큰 돌탑과 버드나무만이 쓸쓸히 종점을 알린다. 그리고 돌탑과 버드나무는 가을비에 더욱 쓸쓸해 한다.

글 사진=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영상=정재인 기자 jji@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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