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자 이순복 대하소설

 화북 지방은 여러 유목민족이 난립했던 5호16국을 선비족의 북위(北魏)가 통일했다가 서위와 동위, 이어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계승되었다. 강남에서는 동진 이후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왕조가 이어졌다.

흔히 부르는 6조라는 별칭은 여기에 삼국의 오(吳)를 포함한 것으로 강남에 세워졌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단순한 혼란과 분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중국역사상의 대 변동기였다.

중국적인 세계가 확대되고 농경문화와 유목문화가 섞이면서 중국의 문화가 더욱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중화의 세계에서 한갓 오랑캐(胡)로 치부되었던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화북지방을 장기간 통치하게 되면서 중국의 문화에는 유목민족의 요소가 가미되었다.

중원을 빼앗긴 한인들은 고향을 두고 강남으로 쫓겨 와서 역사의 변방으로 치부되었던 강남지방을 개발하고 강남 지역민들과 함께 독특한 귀족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런데 사마씨의 나라 서진에서 팔왕의 난이 일어났다.

서진(西晉)의 황족 사마씨 8명의 왕들이 제위 계승 문제로 10여 년간의 내란에 휩싸인 것이다. 이들은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변의 유목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정쟁에 투입했다. 스스로 호랑이들을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점차 서진의 실체가 결코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유목민족들이 서서히 독립하게 되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남흉노의 족장 출신인 유연이었다. AD 304년 유연이 한(漢), 후에 조(趙)로 바뀌어 전조(前趙)라 불리는 나라를 건국했다. 중국 최초의 이민족 지배기인 5호16국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유연의 아들 유총은 거병하여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를 자신들의 근거지인 평양으로 잡아다가 죽이고, 서진의 군사 10여만 명도 학살하였다. 이를 회제의 연호를 따서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에 황족들은 강남으로 피하여 남경에 도읍하고 동진(東晋)을 세우게 되었다.

5호란 흉노, 선비, 저, 갈, 강의 다섯 유목민족을 일컫는다. 흉노는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남아있던 남흉노이고, 갈족은 흉노의 별종이다. 선비는 동북방에서 온 몽골계로 돌궐족이다. 저족과 강족은 티베트계다.

사실은 이들에 의해 동시에, 혹은 시차를 두고 건국되었던 나라들은 16개국이 조금 넘는다. 그중 우리 역사와 관련해서 선비족의 전연(前燕)과 저족의 전진(前秦)이 잘 알려져 있는데, 전진왕 부견은 5호 16국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였다.

망국인의 한(恨)보다 더한 슬픔은 없어라

황건적 난 뒤에도 후한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실권은 호족 출신으로 반란 진압에 공이 컸던 조조가 잡고 있었다.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는 황제 자리를 빼앗고 위(魏)나라를 세웠다. 이에 황실의 먼 친척이라는 유비와 강남의 호족인 손권도 각기 황제를 칭하면서 촉(蜀)과 오(吳)나라를 세우므로 해서 중국은 AD222년에 세 나라로 갈라졌다.

그런데 중국 대륙이 본래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토양인지 위 · 촉 · 오의 3국은 약 60년에 걸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니 이 삼국 시대의 역사를 삼국지연의라는 흥미로운 소설로 기술하고 있다.

이 삼국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나라는 화북 지방을 차지한 위나라로, 만주와 한반도까지도 그 세력을 뻗쳐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AD 263년 위나라는 서쪽의 촉나라를 멸망시켰으나, 2년 후 신하인 사마염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겼다. 새로 진(晋)나라를 세운 사마염은 강남의 오나라마저 멸망시키고 AD280년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이렇듯 중국이 소용돌이 칠 때 그 속에서 역사를 만들고 살아가든 민중들의 고충이 어떠했을까는 우리의 가까운 역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이 망하자 숫한 조선인이 노예로 살았다. 유랑도 했다. 망국의 한을 품고 죽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이 천민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니 그 한 맺힌 가슴을 드려다 보면 석탄보다 더 검게 변해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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