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주형직 을지대 교목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길에 들어설 때가 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충실했던 것뿐인데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려 돌이키기 어려운 경우다.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 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 이른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딜레마란 선택의 순간에서 어느 쪽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 선택은 해야 하는데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미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어떤 분야든 확신은 어렵고 불안만 커지게 된다. 불확실성의 시대기에 딜레마가 불가피한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B(Birth)와 D(Death)사이에 C(Choice)’라고 규정한 사르트르의 말에 자꾸 끄덕여진다. 딜레마는 다소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삶의 의미있는 진전을 위해 마냥 나쁜 건 아니다.

딜레마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어느 쪽도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대체로 이익을 포기하고 손실이 적은 쪽을 택하는 게 일반적이다. 선택의 관점을 이익과 손실 혹은 유불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접근 방법이지만 이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은 오랜 유배생활 중 많은 글을 남겼다. 잘 알려진 ‘경세유표’나 ‘목민심서’ 같은 책들이 유배생활 중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별히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저울이며, 다른 하나는 이익과 손해라는 저울이다. 이 두 개의 저울에서 네 가지 등급이 생겨난다. 최상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도 얻는 것이고,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이며, 그 다음은 그른 것을 추구해 이익을 얻는 것이다. 최하는 그른 것을 추구하다 해를 입는 것이다.”

미래를 불안하게 느껴서인지 점점 더 시비(是非)를 구하는 저울보다 이해(利害)를 구하는 저울만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해를 선택의 우선순위로 두게 될 때 남게 되는 건 경쟁과 갈등이다.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는 것은 부족하고 그것을 차지하려는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시대의 혼란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경쟁에는 승부가 있고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유리한 위치를 선점해 승률을 높이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더욱이 승패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여길 때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정면승부로 승리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편법과 반칙을 고려하게 되고 이 같은 상황이 점점 더 승패를 인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극심한 경쟁으로 인한 사회의 적신호가 켜졌음에도 우리 사회는 경쟁을 성장의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이런 사회에서 경쟁의 틀을 접고 새로운 성장 수단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기존 질서에 지배되고 있기에 상상력의 빈곤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하나의 길 위에 있다면 전쟁은 불가피하다. 곁에 있는 이들은 모두 경쟁 상대일 뿐 고단한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과열된 경쟁은 승패가 결정 난 사안에도 승복하지 못하는 억울함을 만든다. 밤잠을 못 이루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 억울함과 분노로 나타나며 응징과 보복을 정당화한다. 적개심 가득한 댓글과 광장의 섬뜩한 구호는 이 같은 정서를 반영하는 표현이다. 문제는 이 같은 분노를 의로운 분노로 변질시켜 버릴 때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과열된 경쟁으로 이어지고 사회폭력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고 치유해야 할까.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결단이란 버릴 것은 버리고 붙들어야할 것은 붙드는 것을 말한다. 손실과 이익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 선택기준이 돼야 한다. 이 기준이라면 최선의 선택은 가장 옳은 것이지만 차선의 선택 또한 옳은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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