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일기. 충남 청양군 모덕사 소장

19세기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격동의 근대전환기를 경험했다. 사회 계층과 남녀노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들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혹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파란만장한 역사를 몸소 체험했다.

그들 중에는 한말 대표적인 위정척사사상가요, 항일 의병장이었던 면암 최익현의 아들도 있었다. 바로 운재(雲齋) 최영조(崔永祚)이다. 그는 1859년(철종 10) 경기도 포천에서 최익현과 청주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앙 김평묵, 성재 유중교, 면암 최익현 등 당대 명망있는 학자들을 배출하고 있던 화서학파에서 최영조는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그의 성장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친의 정치활동 때문이었다. 최익현이 누구인가?

고종 연간 서슬이 퍼런 권력의 정점이었던 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는 지부복궐소(持斧伏闕疏)를 올렸던 인물이다. 이러한 최익현의 정치활동은 최영조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1873년(고종 10) 최익현이 의금부에 갇히자, 15세의 나이였던 최영조는 옥사 밖에서 자리를 깔고 통곡하며 부친의 석방을 기다렸다.

1876년(고종 13) 최익현이 지부복궐소로 인해 흑산도에 2년 여간 유배되었을 때에는 부친의 생신에 문안을 드리기 위해 경기도 포천에서 매서운 추위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부친을 뵈러 흑산도로 내려가기도 했다. 이때 작성한 일기가 바로 ‘남행일기’이다. 남행은 남쪽 흑산도행을 가리킨다. 흑산도로 내려가는 여정만 한 달이 넘는 고행(苦行)이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포천에서 흑산도까지의 여정에서 최익현에 우호적인 관료와 선비들은 18세에 불과한 나이에 부친의 옥바라지하는 최영조를 격려하며 숙식을 제공하고 여비를 보태주었다. 최영조는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부친의 야윈 얼굴을 보며 눈물을 한참 흘리며 부자의 정을 나눴다.

최익현이 태인의병으로 대마도에서 옥사하자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산항으로 내려갔고, 이후 2년 넘게 부친의 장지를 찾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결국 1909년(융희 3) 충남 대흥군에 부친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한편 최익현이 사망한 이후에는 모덕사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는 등 부친 선양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행적을 정리하기 위하여 곽한소, 최전구 등 최익현의 문인과 함께 ‘면암집’을 간행하는 데 주력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에 부친의 사당을 건립하는 일을 주관하는 빼앗긴 ‘면암집’을 재간행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1931년 최익현의 문인과 함께 ‘면암집’을 간행하였다. 30여 년이 넘게 걸린 역작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부친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런 삶을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운명처럼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학자이면서 항일의병장이었던 최익현에게 최영조는 아들이자, 동지, 때로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최익현이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말미암아 국가보훈처, 문화재청, 역사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와 관련된 연구나 사업이 진행되어 왔으나 최영조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미시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이런 인물에 대한 연구와 지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광균(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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