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우 공주대학교 교수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 우리가 어떤 말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조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그러나 조심하라는 말을 적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등굣길에 나선 아이에게 배웅하는 어머니가 길조심해라 차조심해라 당부하는 것에서부터 여름에는 물조심 겨울에는 불조심 등등 거의 무의식적으로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또 듣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것이라는 반증이다. 조심이라는 말이 이처럼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경우도 있다. 대개 조심하라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말을 더욱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과연 조심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신경을 쓰는 것’이라고 돼 있다. 조심(操心)의 뜻은 글자 그대로는 ‘마음을 잡는다’는 것이다. 마음을 잡는다는 뜻으로서의 조심의 반대말은 방심(放心)일 것이다. 방심의 사전적 의미는 ‘긴장이 풀려 마음을 다잡지 않고 놓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글쎄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잠시 방심한 사이에 일이 이렇게 잘못됐다’는 식의 변명을 한두 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음은 이처럼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다가와 후회와 변명을 안겨주는 미묘한 물건이다. 그러니 우리가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심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생활의 장면에 맞추어 실천에 옮기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조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시 말해 방심하기 쉬운 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잡거나 놓았다고 하는 대상으로서의 마음의 자취를 감각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음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 공부의 요체는 이러한 마음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제해 상성성(常惺惺) 즉, 마음이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눈이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마음을 어떻게 잡는다는 것인가? 보이고 들리는 외물의 세계를 통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통제하는 수 밖에 없다. 잡기 어려운 마음이 생활에 모습을 나타내는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말과 행동이다. 언행을 삼가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이 공연한 것이 아니다. 발걸음을 무겁게(足容重) 하라는 것에서부터 얼굴빛을 씩씩하게(色容壯) 하라는 것까지 구용(九容)의 공부도 이러한 방법을 따른 것이다.
주자가 “담장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을 막을 수가 없다. 외면을 엄숙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온갖 예에 맞지 않는 일들이 이르러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내면을 지키는 좋은 방법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정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정제엄숙(整齊嚴肅)의 공부를 권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손자의 앉음새가 벽에 기대는 등 바르지 못할 때마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크게 걱정을 하셨던 조부의 가르침도 결국은 경(敬)의 경지에 이르는 조심 공부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처럼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힘들게 하시는 것이 원망스럽고 야속하기만 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며칠 전 한 학생으로부터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 그 학생의 말이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선생을 염려하는 그 학생의 따뜻한 마음에 고맙다고 답하는 한편 조심이라는 말의 적절한 사용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계제에 조심한다는 말의 뜻에 대해 좀 더 찾아보고 또 생각해 보게 됐다. 덕분에 조심한다는 말 하나만으로도 생활과 학문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통합돼 있는 옛 성현들의 참다운 공부의 세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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