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석 수필가

조선 중하반기 최고의 르네상스적 지식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영혼이 한밭 대전에서 ‘다산학당(茶山學堂)’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다산학당은 정약용 선생의 경세학(經世學)적 지혜를 빌려 실학사상과 개혁정신을 오늘의 시대에 재조명하면서, 건강한 담론을 생산해 봉착된 현실의 난세를 정도(正道)에 세우고자 도시공감연구소(소장 김창수)가 개설한 학습공동체다.

다산 선생은 학문이 탁월한 철학자이자,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경세가, 또 개혁적 정도의 지혜를 구비한 정치가 및 행정가, 그리고 영민한 인문 학자이자 공학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대(朝鮮代) 최고의 지적(知的), 실천적(實踐的) 성취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대전은 조선조 후기에 성리학의 대가이자 정치가, 주자학의 태두로 걸출했던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선생 등을 배출한 조선조 정치사상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대전에 설립한 다산학당의 의미는 더욱 깊다.

지난 10월 개강한 다산학당은 공직자 및 선출직, 중견기업인,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지도급 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민(牧民)반, 현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시민들의 공동체의식과 준법정신 등 다양한 인문학코스인 여민(與民)반, 또 청소년과 대학생, 공직(公職) 희망자 등 미래세대를 위한 청민(靑民)반 등 3개 반으로 구성돼 50여 명이 수강 중이다.

“다산선생의 학문적 사상을 바탕으로 실학정신을 접목해 나부터 바르게 변화시키고, 나아가 사회 공동체정신을 개혁하는 소명에 밀알이 되고자 합니다.” 김창수 도시공감연구소장 말이다.

다산 선생은 조선조 순조 원년(1801년) 신유박해 때 조정 중진세력들의 파당정쟁과 간신배들의 중상모략이 소용돌이치는 무질서 속에 천주교 탄압정책에 밀려 파직(罷職)과 동시에 전남 강진으로 유배됐다. 그는 무려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면서 삶의 근본적인 가치 수련을 위한 508권의 책을 펴낸 학자다. 지방행정 개혁방안과 목민관(공무원)의 도리를 서술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해 정치제도 및 경제제도 개혁방안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 형옥(刑獄)에 관한 사법적 개혁방안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오늘날 우리 세대가 봉착한 현실까지 꿰뚫어 적시한 책들이다.

다산은 귀양살이 중에서도 당쟁으로 무너진 국기(國紀) 문란을 직시(直視)하고, 대의명분을 빙자한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분노한 선지자였다. 또 천재적 소질을 갖췄으면서도 항상 겸손하고 신중한 가운데 현실을 바로 알고, 바른 행동으로 옮기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개혁가였다.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면 오히려 손해를 보거나 실패하기 적합한 세상, 교활한 권모술수와 비겁한 아유구용(阿諛苟容)만이 성공의 첩경이라고 여기는 세태 관념을 바르게 지적하고, 배척하려 한 게 다산이 저술한 목민심서나 경세유표의 골자다.

다산의 목민심서나 경세유표는 오늘에 더욱 필요해진 시대의 가치 전서(典書)다. 따라서 다산학당이 지향하는 지표도 목민심서나 경세유표를 배우는 진실한 삶의 가치 창출이다. 조선왕조 최고의 실학자이자 정치가, 개혁사상가인 다산의 담론을 통해 미몽(迷夢)에 휩싸인 오늘의 난해한 시국을 바르게 전달하고, 옳게 깨달을 수 있도록 저명한 인사들이 강론한다. 실정법을 위반한 전과자들이 군림하고, 공동체질서를 역행선동하며 억지나 떼법으로 설쳐대는 몰염치가 출세하는 시대정서를 다산의 목민심서로 정화해 보자는 의지다.

‘적폐 청산(淸算)’과 ‘적폐 생산(生産)’이 뒤섞여 어수선한 세상이 바르게 되기를 기대하는 게 다산학당의 바람이다. “백가지 제도가 무너져 모든 일이 어수선하게 됐다. 터럭 한 끝에 이르기까지 병들지 않은 게 없으니, 지금에 와서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다.” 경세유표에 적시된 다산 선생의 우국(憂國)론은 오늘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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