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흔히 눈에 띄는 작은 강아지 ‘발바리’. 그런 발바리가 언제부턴가 연쇄성폭행범을 일컫는 별칭으로 변모했다. 연쇄성폭행범들의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잘 표현한다는 이유에서인데 본 편에서는 발바리 사건 속 법의학의 귀중한 전진을 들여다본다.

#1. 대전, 발바리의 등장

1990년대 중후반 대전 동부경찰서 관할 중이던 A 대학 인근 원룸에서 강도·강간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점차 지역을 넓히더니 1990년 후반부턴 젊은 여성들이 주로 거주하는 갈마동, 월평동, 만년동, 탄방동 등으로 확대됐다.

그러던 중 2000년 8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중부분원(현 대전과학수사연구소)이 개원했다. 당시 새로 개원한 대전 국과수는 현장중심의 감정을 펼치면서 많은 사건을 조기에 해결하는 등 시원시원한 발걸음으로 주목받았다. 중요사건이 발생할 때면 감정인, 수사관들은 격의 없이 토론하고 현장을 공유했다. 한 차원 높은 협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전 곳곳에서 벌어지던 강도·강간사건은 사망 사건이 아님에도 자연스럽게 필자와 국과수 감정인들에게도 들려왔다. 특히 한 달에 한번 씩 열리는 충청과학수사포럼을 통해 사건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2. 대담한 발바리, 누구냐 넌?

국과수 유전자데이터에 따르면 2005년까지 경찰에 접수된 동일범 소행으로 추정되는 이 강도강간 사건은 70여 건이다. 성범죄의 특성상 미신고 범행까지 포함하면 100건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발바리는 알려진 대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원룸 밀집지역에서 혼자 사는 여성, 여성끼리 사는 이들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곤 했다. 범행 초기엔 외판원, 방을 구하는 사람 등을 가장, 범행을 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담하게 피해자를 물색해 따라가는 상황도 발생했는데 상대적으로 문단속이 소홀한 다세대 주택 창문이나 출입문에 몰래 들어가 잠자고 있던 부녀자를 성폭행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범행이 가히 엽기적이어서 성폭행 후 피해 여성에게 목욕을 하게 해서 유전자 증거를 없애는 시도도 했고 여성 4명을 동시에 흉기로 위협한 뒤 한 방에서 번갈아 성폭행하는 행태까지 보였다.

피해자, 목격자 진술에 의하면 범인의 키는 165㎝ 정도였고 피부는 검었다. 특히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의 몸에선 심한 악취가 났다고 했는데 나중에 잡고보니 수사에 혼선을 주기위해 냄새 나는 옷을 차량 트렁크에 넣고 다니며 성폭행 시 입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운전이 서투른 것 같다고 한 것 역시 위장술이었다.

#3. 숨죽인 발바리, 침묵의 공포

발바리 범죄가 방송 등에 전파를 타면서 수사가 확대 진행됐다. 그런 탓일까. 범인은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거나 방송에서 사건이 집중 취급되면 몇 달씩 범행을 멈추는 치밀한 액션을 취하더니 범행지역을 타 지역으로 넓히는 대담함을 보였다.

충북 청주를 거쳐 전주, 광주, 경기도 까지 확대된 것이다. 청주도 발바리 다발지역이었는데 B 대학의 경우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쇄성폭행범 발바리 출현주의보’라는 글을 통해 학생들에게 휴대폰에 ‘발바리가 나타났어요. 도와주세요’ 란 문자를 사전 입력한 후 위급 상황에 즉시 조치할 수 있도록 긴급연결 전화를 설정하도록 홍보할 정도였다.

#4. 법의학, 범인을 찾아라

필자는 대전 국과수 법의관들과 많은 토론을 이어오면서 주된 피해자들의 직업을 고려, 의료기관에 성병 치료 경력이 반복되는 경우까지 조사했다. 그러나 유전자 지문 말곤 피의자를 단정할 만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뚝심 있는 이들의 과학수사로 결국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대전 국과수 유전자분석실에 근무하는 조남수 박사는 그동안 축척된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해 소위 유전자 지리학적 프로파일링을 시도했다. 데이터 분석결과 발바리는 일정한 지역을, 일정한 동선을 그리며 범행지역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어떤 경우는 유전자 프로파일링 예측 지역에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 박사도 사건 해결의 훌륭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최고 유공자는 뭐니 뭐니해도 당시 유동하 동부경찰서 형사계장이었다. 그는 수사에 남다른 의지와 분석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감으로만 하는 수사에서 과학수사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추구했던 전형적 수사통이었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그가 전담팀을 이끌게 됐을 때 대부분의 범죄가 대전에서 발생한 점에 주목하고 유전자 정보를 근거로 경기, 전주, 대구, 청주 등 타 지역 사건 현장과의 동선을 그려내면서 대전 주변 고속도로 나들목의 폐쇄회로(CCTV) 영상분석에 주력했다고 한다.

#5. 발바리, 보통 사람

경찰은 사건이 발생하자 신속한 유전자 정보를 확보한 후 범행 시간대를 전후 해 대전과 사건 발생지를 오간 차량을 찾기 시작했다. 그 소유자를 용의선상에 놓고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용의자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조사했다.

2005년 6월 첫 용의자를 찾았지만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실패를 수차례 반복했지만 그와 수사팀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차량 통행분석으로 뽑은 데이터에 휴대전화가 없는 용의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A 씨였다. 전담팀이 용의자 집을 찾아가 임의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옷을 입기위해 “잠깐 집에 들어갔다 나오겠다”고 했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들이닥치니 A 씨는 달아난 상태였다.

형사들은 A 씨 가족의 동의를 얻어 직계 가족 타액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다. 조 박사는 이를 밤새도록 감정해 새벽에 결과를 통보했다. 그동안 확보했던 유전자 지문, 가족 관계가 완벽히 일치했다. 그 때부터 경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범인 검거에 총력을 집중한 끝에 A 씨가 청소년기에 가출해 거주했던 서울 천호동 일대를 유력한 은신처로 지목했다.

경찰은 그가 도주 당시 특정 게임을 즐겨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A 씨가 다른 사람의 주민번호로 게임에 접속할 것을 예측한 경찰은 그가 천호동에서 공중전화를 사용한 점을 포착, 수사망을 좁혀갔다. 촘촘한 경찰의 수사망을 A 씨도 채 뚫지 못했다.

2006년 1월 19일, 경찰은 천호동 한 PC방에서 A 씨가 게임에 접속한 사실을 포착해 그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붙잡힌 그는 혐의 대부분을 시인했다. A 씨 주변인 증언과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그는 청소년기 가출 등 성장 과정을 제외하곤 문구점과 택시운전을 하면서 조기축구회원으로 활동했고 두 자녀가 있는 가장이었다. 잡고보니 평범한 우리네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 퍽 씁쓸하게 느껴진 이유다.

#6. 국과수의 변화

경찰 간부의 집념의 수사, 법과학자 협업이 대전에서 자욱했던 발바리 공포의 열차의 폭주를 멈추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은 필자에게 ‘현장 중심의 과학수사 발전’이라는 과제를 던진 아주 중요한 모멘텀이었다.

당시 과학수사기법은 지금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필자는 발바리 수사 과정을 함께 하거나 지켜보며 국과수의 미래 과학 수사기법 발전방향을 설계했다. 대전 연구소에 같이 근무했던 조 박사는 유전자를 이용한 혈액형 판별, 유전자 정보를 이용한 성씨 분석 및 인종식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현재 이들은 중요 법과학적 수사 기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 가장 큰 프로젝트는 영상 분야 과학화 및 체계화였다. 현장검안을 하면서 향후 많은 곳에 설치 운영될 CCTV는 수사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당시 CCTV 수사 환경은 열악했다. 화질이 저급해 범인 추적이 어려웠다는 것이 그렇다. 이 때문에 영상을 개선, 범인을 특정해야 할 새로운 감정 툴이 필요했다. 영상이 확보돼 수사 자료로 활용될 경우 감정인들은 모든 영상을 관찰한 후 그 중 일부를 발췌해 사람의 동일성 여부, 신장, 걸음걸이 등 인체특징을 비롯한 차량번호, 교통사고 속도, 차량색상, 신호등 위반 여부 등을 밝혀내야 할 사항들이 너무 많았다. 당시 국과수 영상관련 감정인이 3명뿐이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큰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깔린 이유다.

3명의 소수 인력으로는 분초를 다투는 신속한 수사에 대응할 발 빠른 감정은 불가능한 일이다. 2005년 말 필자가 서울 국과수 본원에서 근무할 때부터 영상 분야 인력확충에 힘쓰면서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디지털 분석 개념은 국과수 내부에서도 생소한 분야였지만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의 이해와 도움으로 국과수 본원 영상실은 디지털 분석과로 확대 개편됐고 국과수 모든 분야 중 국내 디지털 분야의 세계적 수준만큼 획기적인 발전을 했다. 특히 이중 박사가 이끄는 팀은 영상 선명화 프로그램, 위조지폐 판별 프로그램, 개인식별 프로그램 등을 차례로 개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렇다. 조남수·이중 박사, 유동화 계장. 이들은 필자의 과학수사 인생에서 많은 감명을 던져줬다. 선구자적 업적을 남겼음에도 이들의 현재는 아주 평범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상 없이도 국민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눈에는 오로지 국민만 보이고 이 일이 천직인 까닭이다. 

◆ 서중석 소장은
-1957년 1월 3일 전남 여수 출생
-서울 양정고, 중앙대 의과대학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중부분소장·법의학부장·원장 (1991년부터 2016년까지 25년 재직)
-연세대·고려대·경찰대 외래교수, 대한법의학회·아시아법과학회 회장,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WFF) 의장 등 역임
-대전보건대 14대 총장
-성균관대 교수·금강일보 제2기 독자권익위원회 위원장(現)
-수상: ‘유한의학상’, ‘서울시의사회 의학상’, ‘외교통상부장관상’, ‘대통령 표창’(과학수사대상), ‘홍조근정 훈장’, ‘몽골정부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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