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봉 시인, 전 대전문인협회장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느끼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하여 얼굴에 환한 웃음을 달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이는 하루 종일 웃음 한 번 띠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부잣집 곳간 속에 들어 있을까? 평범한 사람의 통장 속에 들어 있을까? 아니면?

행복의 조건은 여기저기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먹고 사는 일상적인 일에 매달려 정신을 빼앗기고 지내느라 참된 자기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기에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닐까?

이 풍진 세상을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내 몫의 삶인지를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덧없이 흘려 보내버리는 사람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이것저것 챙기면서 거둬들이는 일을 우선 멈추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과 지닌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간과한다. 그렇기에 행복은 꽃 피고 새우는 유토피아 같은 곳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버려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꽃처럼 피어난다. 그걸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먼저 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웃과 나는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눠진 가지이기 때문에 이웃의 행복이 곧 내 행복으로 이어진다. 그걸 모르니 행복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아닌가.

소원했던 친구에게 가을날 정감 넘치는 편지를 쓴다든지, 전화를 걸어 정다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일은 돈 드는 일이 아니다. 요즘은 손편지를 구경하기가 무척 힘들다. 사무적인 인쇄편지 속에는 따스함이 없으니 행복을 건져 올릴 수가 없다. 나는 손편지를 자주 쓰는 편이다. 받으며 기뻐할 모습을 그리며 편지를 쓴다. 그의 이름을 일기장에 빽빽하게 적어놓는 것처럼 편지에도 그렇게 쓴다. 이름은 부르라고 지어놓은 것이 아닌가? 편지를 받을 상대가 작고 예쁜 새라면 난 그 새가 맘 놓고 앉아 쉴 수 있는 가지 무성한 나무가 되고 싶다.

모든 것을 돈으로만 따지려는 각박한 세태이기 때문에 돈보다 더 소중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일이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걸 알았으면 한다. 어느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른 것이라고.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듯, 친구 또한 그곳에 그렇게 있지 않은가? 가을밤이면 하늘은 높고 별빛은 영롱하게 빛난다. 도시에서 별 볼 일이 어려울 테니 방안에 별빛을 초대하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천생 소년이요, 소녀가 된 듯한 감흥에 젖을 것이다. 술을 마시다 문득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노라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더 없는 영광이겠다. 내 목소리만 들으면 멀리 있어도 비누 향기 나풀거리는 향긋한 사람이라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영광이겠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주거공간에서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시끄러운 텔레비전 스위치를 잠시 끄고, 전등불도 좀 쉬게 하고, 안전한 장소에 촛불이나 등잔불을 켜보면 어떨까?
아무 생각 없이 한때나마 촛불이나 등잔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그윽해질 것이다. 마음에서 피는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늘나라의 꽃이다. 내가 상대에게 ’NO’라는 대답을 ‘YES’처럼 들리게 만드는 사람, 길을 묻고 싶어지는 친절한 사람, 나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것 같은,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사람이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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