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모 한남대 사학과 교수

이진모 한남대 사학과 교수

베를린에 있는 사회민주당(SPD) 중앙당사(黨舍)에 들어가면 로비 한복판에 높이 3.4m의 청동상이 서 있다. ‘큰 귀’를 가지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바닥에 두 발을 디디고 선 채 뭔가 깊이 생각에 빠진 한 사람. 주름진 바지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은 상대방을 향해 펼쳐서 뭔가 얘기하고자 하는 어정쩡한 포즈. 전후(戰後) 독일 사민당이 배출한 첫 총리, 동서화해의 기수, 노벨평화상 수상자 빌리 브란트(1913~1992)다.

빌리 브란트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 때문일 것이다. 일본 정치가들의 식민 통치 관련 망언과 비교되면서 나치 과거사 반성에 대한 그의 용기 있는 행위가 부각됐다. 사실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행위는 의전으로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브란트는 헌화를 하며 과거 나치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희생자들을 생각하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뭔가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서독 여론 조사에 따르면 브란트의 행위에 공감하는 사람은 41%였지만 부정적인 반응도 적지 않았다. 논란이 있었지만 그의 행위는 동서화해를 추구하는 동방정책의 디딤돌이 됐다. “그는 무릎을 꿇었고 독일은 다시 일어섰다”는 평도 나왔다. ‘더 많은 민주주의’ 실현에 총력을 기울였던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브란트는 유럽 평화와 사회주의 연대뿐만 아니라 제3세계 빈곤 문제 해결 등에 대해서도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며 평화정치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앞장섰다.

화려한 정치 역정과 달리 브란트의 인생사는 몹시 험난했다. 유럽 사회주의 정치가들 중에는 하층 노동자 계급 출신이 적지 않지만 그는 ‘사생아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헤르베르트 프람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성(姓)은 어머니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인 마르타 프람이 미혼모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게 점원으로 일했던 마르타 프람의 어머니도 미혼모였다. 결국 헤르베르트 프람은 미혼모인 어머니와 의붓 외할아버지에게서 자랐고 특히 재혼한 뒤에도 자신을 보살폈던 의붓 외할아버지를 아빠로 부르며 성장했다. 이런 출생과 성장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 브란트의 인물됨도 간단치 않았다. 한 마디로 인간 브란트는 약점 투성이의 인물이었다. 그는 우울증, 음주, 여자관계 등 사생활 문제로 동료와 참모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열악하고 험란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대한 정치가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수많은 정적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던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비전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추구했던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보장되고 사회적으로 완성된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전 사회적 확장이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그의 비전에 열광했으며 그의 비전과 열정, 대중친화력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오랜 세월 그를 인내하고 보호하고 키웠다. 두 차례 낙선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그를 신뢰한 당의 지원에 힘입어 브란트는 결국 전후 최초의 사민당 수상이 돼 동서화해의 시대, 사회민주주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이 길은 독일통일로 이어졌다.
빌리 브란트 하우스 로비에 우뚝 서서 오늘도 지나가는 이들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빌리 브란트 상은 정치가로서 그가 보여준 품격, 그리고 약점 투성이 빌리 브란트를 동서화해와 세계평화의 선도자로 키워냈으며 오늘도 그의 품격을 소중히 여기는 150년 역사를 가진 한 정당의 품격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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