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대전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사업단 단장

 

유성 지족실이란 마을에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가난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마침 신탄진 부잣집에서 일꾼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다행히도 청년은 착한 주인을 만나 먹거리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유성에 살고 계신 부모님은 여전히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일이다. 고민 끝에 청년은 생각했다. 부잣집에서 자신에게 준 먹거리 일부를 남겼다가 지족실 부모님께 갖다 드리겠다는 계획이다.

청년은 매일 밤 모아둔 먹거리를 싸들고 밤새 유성 지족실 마을을 다녀왔다. 거리로 치자면 대략 40리 길, 도보로 서너 시간 소요되니, 밤새 다녀와야 할 거리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유성 부모님을 찾아 봉양하는 생활이었다. 그래도 청년은 부모님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했다.

어느 날 그날도 역시 먹거리를 싸들고 황급히 부잣집을 나서는데, 주인집 딸이 길을 막아섰다. 깜짝 놀란 청년에게 딸은 뭔가 보따리를 내밀었다. 비단 옷이었다. 지족실 부모님께 갖다드리라는 부잣집 딸의 선물이었다. 딸은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청년에게 말했다. 이렇게 지체하다간 내일 동트기 전에 못 돌아온다며 속히 갖다 오라고 재촉하는 말이었다.

평소 청년의 성실하고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주인집 딸의 아름다운 배려였다. 아마도 이 때까지는 배려였던 것 같다. 청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그날 밤도 유성 부모님께 다녀왔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주인집 내외가 한양을 다녀오더니, 딸이 한양으로 시집간다는 얘기가 들렸다. 청년은 일이 잡히지 않았다. 막상 딸이 한양으로 시집가던 날 딸은 남모를 눈물을 흘렸다. 멀리 뒤 곁에 숨어 묵묵히 바라보던 청년의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딸이 시집가자 청년은 아무 일도 잡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멍하니 주인집 딸이 떠난 그 길만 바라보았다. 다시 달려올 것만 같은 그 길가엔 그저 쓸쓸한 나뭇잎만 날렸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던 청년은 주인집에 양해를 구하고 유성 지족실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가 멀리 신탄진이 바라보이는 뒷산에 올랐다. 매일매일 뒷산에 올라 신탄진을 바라보던 총각은 결국 병들어 죽고 말았다.

그런데 총각이 신탄진을 바라보던 그 산봉우리 정상부에 바위가 생기고 벚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바위와 벚나무는 총각의 화신이었다. 이후로 신탄진에서 이 바위와 벚나무가 보이는 날에는 신탄진 사는 처녀가 미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청년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바위와 나무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신탄진에 화가 없어졌다.

이상은 유성 지족실 마을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효와 사랑이 어우러진 전승설화이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청년과 그 마음에 동정하는 주인집 딸의 알 수 없는 정서가 깔려 있다. 또 그런 주인집 딸을 그리는 청년의 애절한 마음이 잘 그려져 있다.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시작은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효는 부모를 향한 것이지만 그 순수한 모습은 주변의 감동을 준다.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아련히 그려지는 모습은 여러 생각을 갖게 한다.

사면 산지로 둘러싸인 대전 곳곳에 이런 효관련 설화가 내려온다. 하지만 잊혀가는 게 아쉽다. 보이는 문화가 소중하다면 보이지 않는 문화도 못지않게 소중하다. 대전효문화진흥원에서는 이런 대전의 유무형 효문화자산을 구청 단위별로 모아 자료집으로 출간한다. 의미와 감동을 주는 내용은 따로 모아 코스별 효문화관광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묶을 예정이다.

그리고 시민들 발길이 닿는 곳에 소개할 계획이다. 크게는 전국의 유무형 효문화자산을 모두 모아 ‘한국효문화자료보감’을 펴낼 구상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보배가 될 수 없다. 대전이 그렇듯 전국 방방곳곳의 보배로운 효문화자산, 그 꿰는 작업을 효문화진흥원에서 추진할 예정이다. 명실상부한 효문화 중심도시 대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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