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주형직 을지대 교목

 한 해를 마감하면서 가장 아쉬운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면 소통을 말하고 싶다. 소통이란 ‘생각하는 바가 잘 통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내 생각에 동의하거나 상대가 승복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럴 때 말이 통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소통은 상대와 나 사이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의견임에도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소통이 우리 시대 중요한 화두로 부각되는 건 그만큼 소통이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는 예의를 중시했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미덕으로 여겼다. 말에 형용사가 많고 직선적 표현보다 에둘러 말하는 완곡어법을 매너로 여긴 건 그 때문이다. 말에는 해석이 따르고 행간엔 숨겨진 의미가 있다. 말을 바르게 듣고 정확히 이해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다.

사실 소통보다는 권위 있는 의견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게 평화 유지의 방법이었다. 의견에 딴지 없이 일방향으로 흐르는 걸 소통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쪽의 답이 관철되는 것을 더 이상 소통으로 여기지 않는 시대다. 설득과 협상이 필요하고 자발적인 동의가 중요해진 것이다.

시대문화 역시 소통을 강조한다. 누구나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이야 말로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휴대폰은 통화를 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찾고 자신의 생각,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대표적 소통기구다. 이제 휴대폰은 잠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물건이 됐지만 여전히 소통은 아쉽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소통수단이 발전한다고 해서 그 효과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 소통은 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기 때문이다. 휴대폰의 발전은 소통 중요성과 무관하지 않지만 한편으론 소통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관계를 회피하면서도 스마트폰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소통은 중시되고 그 도구 역시 혁신적으로 발전하는데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뭘까? 본질적으로 관계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형성은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교제는 생각을 나누고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을 요구한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얼굴을 맞댄 대화는 타자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대화는 타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대화가 어려운 건 이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만남 가운데 서로를 받아들이겠다는 암묵적 동의가 이뤄지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대화하게 된다. 대화에는 감정을 조율하고 존중과 예의가 포함된다. 묵시적인 배려가 약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받아들이겠다는 동의가 있어야 본격적인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소통도구는 이 과정을 생략해 버린다. 자기주장을 위해 상대의 눈치를 살피거나 예의를 갖추고 존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날려 보낸다. 상대를 받아들이겠다는 과정 없이 거리낌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비난하기도 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상처받는 일도 빈번하다. 소통의 시대에 소통되지 않는 모순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서로를 이해하는 인간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점으로 인해 당황스럽고, 곤란한 경우에 처할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을 극복해야 교제가 가능하고 소통이 이뤄진다.

산 위에 물 흐르는 주변의 돌을 보면 대부분 뾰족하고 날카롭다. 그러나 산 아래 강가에 돌은 다르다. 오랜 세월 부딪치면서 깎이고 다듬어지는 것이다. 사람 관계도 비슷하다. 서로 다름은 날카로운 돌처럼 위협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무뎌지고 다듬어지면서 존중과 배려를 배워갈 수 있다. 왜곡이나 오해 없이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것이다.

이 시대 대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날이 점점 더 추워진다. 상대의 말에 마음을 조율하고 감정을 다스려가는 이들이 그립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