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원진의 녹패.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지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관료제이다. 전근대사회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사회에는 대통령이나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가 운영되었다. 일원적인 관료제는 최고 통치자의 권한을 강화하는 핵심 제도였다.

그러므로 고금과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국가들은 관료제를 정비하고 운영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해왔다.

조선시대 관료제는 정1~종9품에 이르는 30등급의 품계를 설정하고, 관료제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왕조는 이들에게 국역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것이 바로 녹봉(祿俸)이었다.

녹봉은 임금이 관료제를 운영하며 신하들을 독려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기부여였다. 녹봉은 경제력이 취약한 하급관리에게는 절대적인 생활기반이 되었으며, 고위관리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상징하는 표식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국왕은 ‘자신의 마음을 다해 진실로 대해주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관료를 권면하는 방법이다[忠信重祿所以勸士也]’라는 ‘중용’의 구절을 이용하며 녹봉 지급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녹봉을 받을 관료를 18등급으로 나누어 쌀, 콩, 면포, 화폐 등의 물건을 1년에 4번(1월, 4월, 7월 11월)에 지급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국가재정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여러 논의과정을 통해 마침내 산료(散料)라고 하는 녹봉제를 운영하였다. 산료는 조선전기와 달리 총 13등급으로 녹봉구간을 설정하고, 매달 녹봉을 지급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의 관료들은 얼마나 녹봉을 받았을까? 위에 제시된 한원진의 녹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녹패는 녹봉을 지급한 일종의 월급명세서이다.

녹패의 우측 상단에 녹봉 수령자의 계사직(階司職)이 해서체이면서 전서체의 모양처럼 기록하였는데 이 형식은 17세기부터 나타났다. 다들 알고 있듯이 한원진은 18세기 사상논쟁인 호락논쟁(인물성동이론)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명이다.

그는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대학자였다. 그는 1726년(영조 2) 종4품 조봉대부 관등에 있으면서 종부시 주부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과등(科等)은 9과였는데, 한 달 녹봉은 쌀 16말과 콩 6말이었다.

연봉으로 계산하면 약 쌀 16가마니, 콩 5가마니 정도였다. 참고로 조선후기 삼정승의 한 달 녹봉은 쌀 38말과 콩 20말,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판서의 녹봉은 쌀 32말과 콩 20말, 말단직인 종9품의 녹봉은 쌀 10말과 콩 5말이었다. 녹패에는 이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국가예산이 부족해지면 고위관료의 녹봉은 삭감해도, 하급관료의 녹봉은 정례대로 지급해주었다. 상박하후(上薄下厚)의 정치가 관료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녹봉제에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문광균(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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